교회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 또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세상에 정의와 자비를 베푸는 것”이나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각각의 대답들이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 중 하나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첫 번째 문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지만, 성경은 예배드리는 방법에 대해 몇 군데에서만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예배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희생 제사와 관련 된 그러한 수많은 가르침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 믿습니다.
더 나아가,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예배 매뉴얼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예배들에 대해서 설명하기는 합니다. 예배가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기대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과 같은 몇 가지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부분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겠지만, 크리스천들은 거의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예배 순서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우리의 고백은 복잡해집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해 응답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고 더욱 깊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회중 예배는 결혼 예식과 비슷합니다. 결혼 예식을 행하는 것은 단지 잘 차려 입기 위해서도 아니고 더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결혼 예식은 남녀 간의 관계를 인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에 대한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이미지 중 하나가 언약인데, 우리는 더 이상 언약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약이 근본적으로 약속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가게에 20달러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가게는 여러분에게 약간의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할 때 일종의 계약이 성립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핵심적인 언약 중 하나는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신 약속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롭게 그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약속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응답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순종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언약은 종종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모임이나 행사에 의해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가 한 건축 업자와 계약서에 사인했을 때 그 계약이 성립되는 것과 같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 예식이라는 일종의 형식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기로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배우자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이 언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 서약을 갱신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원래의 약속을 반복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지만, 남편과 아내는 근본적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의식을 통해 원래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게 됩니다.
아니면, 언약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오랜 친구들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구가 자신에게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마주 앉습니다.
업무 관계가 진부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상사는 정기적으로 부하 직원들과 함께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고 서로에 대한 기대치를 검토하곤 합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시내산에서 언약 의식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법도”를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하신 모든 것을 하겠다는 약속으로 응답했습니다.
렉셔너리가 지정한 이번 주일 구약 본문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드디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로부터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유혹하는 낯선 땅에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들은 아름답고 그들의 신들은 강력해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을 저버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약속한 대부분의 약속을 지켰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자된 아들 딸들인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필요를 가장 분명하게 인식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종류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나, 심각한 질병이나 관계 문제가 생겼을 때나,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해졌을 때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가장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가볍게 여기게 될 때가 언제입니까? 일이 잘 풀릴 때 종종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본문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일에 이스라엘을 초청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되돌아 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해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정착지로 데려오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많은 일들을 회상합니다.
14절에서 그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신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여기서 출발한 그는 15절에서,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일 텐데,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섬길 자를 스스로 택하라 …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합니다. 본질적으로 그는 동료 이스라엘에게 조상들이 애굽에서 숭배했고 그들도 때때로 숭배하고 있던 신들을 버리라고 도전합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만 경배함으로 그 분만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자신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응답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그의 집안 사람들과 함께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동료인 John Witvliet과 다른 학자들은 기독교 예배를 본문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언약 갱신 의식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본질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주고 받은 결혼 서약을 재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생각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종종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로 결혼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62:5 말씀에서 선지자는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기뻐하시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7 말씀에서 요한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오는” 때, 즉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자신을 준비시키는 때에 대해 말합니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으시고 지키신 약속들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그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종종 서로에게 여러 약속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사람들에게 한 서로 다른 여러 약속을 지키느라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는 일에 너무 쉽게 실패합니다.
가정과 직장과 이웃 안에서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서로를 경청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때 그토록 중요하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더 중요한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어떤 관계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관계를 갱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일상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친구들이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배우자들이 결혼 컨퍼런스에 참석하기도 하며, 직장 동료들이 잠시 일터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예배에도 약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예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새롭게 합니다. 이 모든 언약의 갱신의 목적이 하나님과께 대한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그 사랑을 깊어지게 하십니다.
물론, 언약은 애초에 언약을 맺은 경우에만 갱신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먼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서약을 주고 받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서약을 갱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고, 우리가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약속을 믿음으로 받은 적이 없는 예배자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예배의 모든 것이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예배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의미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매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언약 갱신의 패턴이 단지 회중 예배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 패턴은 우리의 일상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일에 여호수아 24장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은 청중과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좋은 습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헌신을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든, 친구들이나 가족 단위로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일부를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듣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칩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갱신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한 지역 기독교 학교가 그 학교의 미션을 대중에게 홍보하려고 할 때, 일부 사람들은 부모와 교회가 그들의 의무 조항을 시행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공약을 내걸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구성원들이 그 아이디어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의무”(covenant)는 미국 인종사의 야비한 부분을 떠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Fair Housing Center of Greater Boston 웹사이트에 따르면, 부동산 구매자 증서에 인종적인 제한에 대한 계약 의무가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정 집단이, 일반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토지의 일부를 구입하거나 임대하거나 심지어 점유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이러한 의무가 부동산 위원회와 지역 협의회의 협력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1-3a, 14-2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