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위한 첫 번째 RCL 읽기의 연관성을 찾는 일은 특히 미국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은 대통령 선거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이끌 리더를 뽑는 일에 자신들의 견해를 투표로 표현하는 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후보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지를 분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분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늘 본문의 핵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리더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본문 7절에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를 이스라엘 목전에서 높일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듯이 너와 함께 하는 것을 그들이 알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복잡한 세상에서 이것은 훨씬 더 넓고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 알리시는데, 그들은 지금 약속의 땅 앞에 있는 요단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승리 또는 비극 직전에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 눈 앞에 어렴풋이 보이는 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수백년동안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을 정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이 그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까?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0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심과 그가 반드시 너희 적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옳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 각자가 신앙 생활을 할 때에 만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갈 때에 부딪히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리더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생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 성공을 주실 것이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접어들었을 때에 생겨났습니다. 이집트와 출애굽은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을 목격했던 모든 성인들은 지금 다 죽고 없습니다. 그들은 험난한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습니다. 그 때에는 모세라는 걸출한 리더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후손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들이 경험한 위대한 일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백성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세워놓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검증되지 않은 리더와 함께 한 이스라엘은 지금 그들의 조상들처럼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을 뒤쫒는 바로왕이나 그들 앞에서 버티고 있는 홍해는 없습니다. 그들 앞에는 범람하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 너머 저 멀리 약속의 땅에는 일곱 족속들이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두렵게 했습니다.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너무도 강해서 무적에 가까워보였기에 38년동안 보였던 이스라엘의 신앙조차도 힘을 잃었습니다. 모든 새로운 세대가 그렇듯이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이 올바른 리더를 따르고 있는지,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난 강물에 담대하게 발을 내디뎠던 제사장들에 의해 운반된 언약궤를 이스라엘이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적이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 앞에서 그들 조상들의 신앙의 길로 가도록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의 각 요소들은 중요하기에 그것을 함께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증거로서 금으로 입힌 상자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광야에서의 만나,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돌판 등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하나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성막의 지성소에 안착되어 있는 언약궤에 둘러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하는 순간입니다.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에 진노하신 하나님께 모세가 중보기도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을 철회하셨고,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출33:14)고 약속하셨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상징과 기억 이상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것과 비등한 정도의 새로운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요단강은 그와 같은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현대적 형태의 요단을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것이 큰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몇 년전 그곳에는 누구나 건널 수 있을만큼의 기름진 회색빛 녹색 개울물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인근 농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빨아들이는 시기여서 가장 낮은 유량의 요단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요단은 비가 쏟아진 후와 헐몬산의 눈들이 다 녹은 후에 범람하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적어도 반 마일, 아마도 삼분의 이 정도의 넓이였다고 추정합니다. 헐몬산 원류에서 사해까지 1 마일 이상을 흘러들어왔을 것이라 예측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양들을 다 쓸어버릴 정도의 양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에 발을 내딛는 것은 진정한 용기였습니다. 심지어 엄청난 무게의 금들을 운반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언약궤를 운반한 믿음의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핵심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명령들이 주어졌습니다. “너희가 요단강 물가에 이를 때에 가서 강에 서라.”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도 주십니다. “하류로 흐르던 물들이 끊어질 것이며 무더기로 쌓일 것이다.” 빌 코스비가 연기했던 노아를 인용하자면, “맞아요! 물 무더기가 뭐죠?”
우리는 호수나 강에서 물 무더기를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파도라 부릅니다. 그러나 파도들은 하루 종일 서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무너져내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걷고 격량치는 물에 들어가며 강 한가운데에 선다면, 엄청난 양의 무더기가, 문자 그대로 상류에서 20마일 떨어진 아담의 마을에 물의 산이 서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강바닥의 마른 땅을 지나갈 때까지 물 기둥은 하루 종일 그대로 서 있을 것입니다. 수문학(물을 연구하는 학문)조차 상상하지 못할 일입니다.
믿음으로 제사장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를 넘치는 물 속으로 가져갔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 물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정확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겸손과 순종의 자세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선택한 리더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강력한 적들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의 산을 보십시오. 마른 강을 보십시오. 그 곳을 땅처럼 걸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와 같은 기적들은 항상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의 역사에서 그것들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때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에 오셨을 때, 약속의 땅은 기적들로 넘쳐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예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의 말미에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생명의 떡, 세상의 빛, 부활이요 생명 등등)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표징들을 나타내신 것을 두고 요한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 전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하나의 주문을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기독교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 세대 밖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브로마이드 뒤에 숨은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기독교 신앙 이야기와 그 의미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예수님과 그의 사랑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 세대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던 곳에 예수님이 선교사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이 말은 좀 과장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백히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신앙 교육을 시켜야한다는 것에 동의하십니다. 단지 말로만이 아닙니다. 이는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12명을 왜 임명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3장에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가 요단을 마른 땅처럼 통과할 때에 그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강 한 가운데 있는 열 두개의 돌들을 취하게 했고, 기념비로서 강 둑에 그것들을 쌓도록 명령하십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미래에 너희 자녀들이 ‘이 돌들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그들에게 주의 언약궤 앞에서 어떻게 요단강물이 끊어졌는지를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의 삶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셨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돌, 빵과 포도주, 물에 의한 기념물들은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신 그분(그리스도)을 말입니다. 마태복음이 예수가 그 임재임을 처음과 끝에서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3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8:20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지요?”라고 묻는 불신앙의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확신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미국은 이 선거에 돌입하면서 모든 시민과 모든 국가를 염려하게 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너무 많은 시간을 선거 부정과 선거 사기에 관한 이야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를 믿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트럼프나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확신시키려면 어떤 증거가 필요할까요? 어느 것이 하나님의 선택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세상의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호수아 3:7-17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