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1:1-6 주석

Lectionary의 3년 주기에서 오늘이 우리가 애가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독자들은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도 이 본문을 처음 접했을 때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순전히 애도의 구절인 6개의 짧은 구절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 친구이자 이전 교구 신자였던 Susan(본명이 아님)을 생각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이 Susan에게 일어났습니다. 58세의 나이에 그녀는 어린 시절의 뇌 손상으로 인해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가 점점 힘들어지자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교직으로부터 은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입을 잃었습니다. 정신적 고통이 점점 심해지면서 그녀의 신체 건강마저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갔습니다. 그 후 그녀는 운전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작은 콘도에 홀로 앉아, 가족도 없이, 이동 수단도 없이, 완전히 고립된 채 삶에 짓눌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도움을 간청하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애쓰며 울고 또 울지만 자신의 문제에 무너지고 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고 애쓰지만 결코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풀 수 없는 어려움들과 끊임없는 불평 때문에 좌절합니다. 최근에 그녀는 운전면허를 박탈 당한 사건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고통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정심 많은 상담사인 저는 그녀에게 그것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고, 그 일은 끝났으며, 그녀에게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단 한 번의 사건이 당신의 남은 인생 전체를 망가뜨리게 두지 마십시오.” 저는 최고의 예언자적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를 욕하지 마시고 계속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가 제가 공부한 애가 1장이 양날의 검처럼 제 마음을 꿰뚫을 때였습니다. 애가 1장은 사실상 “울어도 괜찮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음이 시원해 질 때까지 우십시오. 눈물을 막지 마십시오.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게 하십시오.” 시편에 있는 슬픔의 시들과 달리 대부분 애가는 슬픔의 원인으로부터 해방을 구하면서도, 하나님을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애가는 단지 하나님의 백성을 압도한, 마음을 마비시키는 공포 때문에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애가는 순전히 애가이고, 나는 그것을 들어야 합니다. Susan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설교하십시오! 형제, 자매님!

그렇게 하려면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애가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정복되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묵시적 상황 이후의 회상입니다. 예레미야 32장 마지막에 예언된 일이 상상할 수 없는 폐허와 함께 발생했습니다. 여기에서 초점은 황폐한 도시인 예루살렘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는 텅빈 도시를 예전과 비교하면서 그 파괴를 묘사합니다.

그 설명은 매우 신중하게 작성되었습니다. 사실, 순전한 슬픔을 쏟아내는 이 애가는 세심하게 구성된 시입니다. 이 책에 있는 다섯 개의 애가들 각각 히브리어 알파벳의 글자 수인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66절, 3 x 22로 구성된 3장 중간에 있는 애가는 제외) 실제로 각 절은 연속 되는 각각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알파벳 순으로 작성된 시는 한 학자가 말하듯 “섬뜩할 정도로 불안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저자(전통에

따르면 그 저자는 예레미야라고 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그렇게 확신하지 못합니다)는 이러한 순전한 애도를 바로잡기 위해 굉장히 많은 창조적 에너지를 소비했습니다. 그러한 슬픔은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 C.S. Lewis의 놀라운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을 신실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표면 바로 아래에서 우르릉거리고 때때로 전체를 보기 위해 분출하는 깊은 신학을 알아야 합니다(참조, 5절). 첫째, 저자는 우리의 삶을 파괴한 저주받은 이 바벨론 사람들이 실제로는 신적 보응의 대리인이라고 가정합니다. 비록 멸망 시키는 일을 담당한 것은 그들의 손과 발이었을지라도 그 도성과 성전을 멸하신 분은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실까요?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와 언약을 깨뜨리는 반역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당한 화의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바로 잡아 달라는 탄식과 부르짖음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지라도, 심판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진실한 회개여야 한다고 애가는 말합니다. 이와 같이, 애가는 애통함으로 시작하고 회개로 끝을 맺습니다.

애통함과 회개 사이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자비로운 형벌 사용에 관한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들 중 몇몇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3:22-23).”

설교를 좀 더 다채롭게 해주는 애가에 대한 세부사항이 있습니다. 저자가 현재와 과거를 대조함으로써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주목하십시오. 한때 번성했던 도시는 이제 황폐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한 여자와 같습니다. 전에는 한 남자의 아내였으나 이제는 과부입니다. 한때는 여왕이었지만 지금은 노예입니다. 한때는 어머니였으나 지금은 모든 자녀들이 “바베론으로 잡혀”가 남은 자녀가 하나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 알게 합니다. “그녀를 위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요?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고 당신을 위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Susan에게는 나같은 비천한 위로자가 있습니다.) 모든 “연인들”(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우상 숭배의 정욕을 가지고 따라 갔던 거짓 신들)과 모든 “친구들”(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바벨론에 대항해 도움을 요청했던 주변 국가들)—그들 모두는 가버렸거나 지금은 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외로운 과부라는 이미지에서 본문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로 이동합니다. “유다는 열방들 사이에 거하지만 쉴 곳을 찾지 못합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신명기 28:65에서 이스라엘이 안식의 땅인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직접적인 경고입니다.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면 안식처를 잃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렇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삶의 리듬과 의식들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정한 절기에 아무도 오지 않”기 때문에 황폐해지고, 제사장들은 탄식하며 처녀들은 슬퍼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했던 자들이 이제 그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방백들은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굶주린 사슴처럼 연약해졌습니다. 그림 그림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겪는 운명의 역전이 가슴 시리도록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5절의 혼란스러운 구절에서 신적 보응에 대한 깊은 신학이 표면으로 분출됩니다. “주 여호와,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우리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의 죄가 많으므로 그를 곤고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이스라엘은 거듭 거듭 물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슬픔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합니다. 당신의 잘못입니다. 듣기 너무 힘든 말이였지만 이스라엘은 그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의 설명이 고통을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슬퍼했습니다.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애통함을 이끌어내고 정당화하는 방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가에 잠시 머무르는 일은 중요합니다. 모든 고난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동시에 고통 가운데 우는 것도 허용해야 합니다. 때론 할 수 있는 최선은 통곡하는 일입니다. 비록 슬픔이 죄와 연결되어 있더라도 이렇게 우는 일은 완전히 합당한 일입니다.

사실 한탄하지 않고 애도를 억누르면 슬픔이 지하로 가라앉아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정과 기억 상실을 실천하는 문화에서 애가는 진실 말하기를 권장합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의 눈물은 고립된 눈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를 통해 흐르는 눈물의 강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가 애도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he New Interpreter’s Bible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대신에 필요한 것은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깊이 확장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해답, 교리, 해결책, 즉 복음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한탄으로 멈출 수 없습니다. 내 친구 Susan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낙담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고무적인 애도는 우리의 마지막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애가의 마지막 단어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가지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행위인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일에 사람들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슬픔의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화신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슬픈 말은 이사야서 53장의 친숙한 제목을 구체화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교회가 예루살렘, 적에게 빼앗긴 외로운 과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슬픈 세상에서 우리를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자신이 예언한 바로 그 백성의 슬픔에 목소리를 내고 애가에서 죄 많은 이스라엘을 동일시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의 죄 많은 교회의 슬픔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교회의 일부가 고난주간의 마지막 3일 동안 애가를 사용하여 우리의 슬픔과 그리스도의 슬픔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백성의 고통을 동정하고 공감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실제로 궁극적으로 모든 고통을 야기하는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는 죽음(“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으로 유배되어 우리가 “안식할 곳”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폐함과 심판과 굴욕과 슬픔을 말하하고 있는 본문의 구절들은 역사를 묘사하거나 감정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과 같이 ‘여러 나라의 범법’으로 ‘고난'(5절) 받으신 그리스도 인격 안에서 실현된 예언의 실현입니다.” 더 나아가 성육신하신 말씀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그는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의 끝없는 애가는 우리의 죄를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슬픔의 사람을 보내셔서 우리의 기쁨을 완전하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의 끝없는 돌보심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애가의 중요성을 전할 때 무엇보다 딸 시온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나는 이 글을 9월 11일, 나라 전체가 애도하는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 19주기 기념일에 쓰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슬퍼해야 할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Frank Yamada가 발표한 그러한 사건들이 품고 있는 슬픈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국가적 비극은 지역 사회 전체의 말문이 막히게 할 위험이 되었습니다. 집단적 슬픔은 전체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슬픔에 목소리를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애가 1장과 같은 성경 구절이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해 우리의 슬픔과 애통을 담당하러 오신 구주가 계시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