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2:1-3a, 6-15 주석

성경 속 부동산 거래가 이렇게 멋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부동산, 땅, 누가 그것을 소유하는가 하는 주제가 계속 나옵니다. 그 시작은 아브람에게 주신 땅의 약속이었지요 (이상하게도 그는 이미 가지고 있던 땅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결국 그리 많이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죽을 때까지 가나안 약속의 땅에서 가졌던 유일한 땅은 사라의 무덤을 위해 구입한 아주 작은 땅 조각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많은 구약 인물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멀리서만 보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유일한 유산이 사랑하는 아내의 무덤 터였던 아브라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온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되기까지는 수 세기가 걸렸고, 그나마 결국 그 땅을 잃었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땅에 대한 개념과 그 신학적인 의미는 처음부터 성경에서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예레미야 32장에서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엄청난, 그리고 신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가족이 분배받은 약속의 땅 중 한 부분을 사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평소라면 흔한 일이었을 법한 이 거래가 바로 그 시점에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도 폭락할 것을 알면서 대량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집이 기초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말기 암 환자에게, 의사가 길어야 2주밖에 못 산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신장을 기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적들은 성문 앞까지 와 있었고, 방어벽은 버티지 못했습니다. 땅은 약탈당하고 있었고, 모든 백성이 끌려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심판과 재앙의 예언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레미야 32장에서 예레미야는 바로 그 예언들 때문에 왕궁 뜰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의 끊임없는 부정적인 예언에 진저리를 쳤고, 그의 입을 막으려고 그를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고 하나님께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상황을 넘어선 메시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의 말을 곱씹으며 속을 태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오히려 극도로 희망적인 새로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시드기야를 괴롭히는 이 모든 일은 어제 뉴스에 불과하다” (비록 그 끔찍한 사건들이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지만)고 말씀하시며, 더 나은 미래, 더 소망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예레미야가 땅을 산 것은 당시 상황에서 전혀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언젠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다시 사고팔고 소유할 날이 올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올 것이고, 새 날이 올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부동산 거래는 정확히 말해 문화에 반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상황과 닥쳐오는 멸망을 생각하면 분명 직관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직관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직관, 곧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새로운 인식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많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오늘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예배드리고, 특정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자녀를 키우는 방식은 마치 5등급 초대형 허리케인이 덮쳐오고 있는 걸프 해안에 집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행동한다고 말씀드릴 때, 상업과 이익, 명성, 권력을 좇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왜 일요일 아침에 하나님께 찬양하고 설교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십니까? 집에서 “월스트리트 위크” 방송을 보면서 당장 돈을 불리고 성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나아 보일 수 있습니다. 왜 자녀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보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직 자기 자신만 믿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의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비판에 예민해져서 예레미야와 같은 믿음의 행동을 숨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온순하게 길들이고, 근본주의 광신도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취미처럼 다룹니다. 예배를 마치 커피하우스 모임처럼 꾸미고, 신도들이 세상에서 잘 어울려 살아가도록 돕기위하여 설교 제목을 “사업을 성장시키는 5가지 방법”, “성공적인 자녀 양육 7단계”처럼 실용적으로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할 용기 때문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땅 거래를 해서 어리석게 보일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용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 담대함과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화 아이디어

1978년 영화 슈퍼맨 에서 언론은 한 사건을 보도하면서 큰 화제를 만듭니다. 미국 남서부의 쓸모없는 사막 땅을 누군가 익명으로, 그것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들이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거래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 정체는 악당 렉스 루터였습니다. 그는 샌안드레아스 단층에 핵폭탄을 터뜨려 캘리포니아의 절반을 태평양 속으로 가라앉히고, 그 결과 기존의 사막 땅이 해변 부동산이 되어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을 노렸습니다.

허무맹랑한 설정이지만, 렉스 루터의 기이한 부동산 거래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예레미야의 땅 거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의 의문과 비난을 살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 실제 역사 속 사건에는 분명하고도 기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과 그분의 백성을 새롭게 하시려는 소망의 표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