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친숙한 사람들은 아마도 많은 중세 화가들이 유럽, 특히 독일에서 오랫동안 해왔던 재미있는 습관을 기억할 것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와 같은 예술가들은 성경 속 장면들을 많이 그렸는데, 중세 시대의 옷을 성경 인물들에게 입히는 기발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 장면이나 그리스도가 어린 아이를 축복하는 장면에서 1세기 중동 사람들이 실제로 입었던 옷이 아닌 중세 유럽의 복장으로 입혀진 인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 것과 새 것,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그림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만약 어떤 화가가 갭 청바지 입은 요셉, 랄프로렌 블라우스를 입은 마리아, 매기가 아르마니의 멋진 정장을 입은 동방박사를 그렸다면, 오늘날 많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말할지 상상할 수 있을까요? 틀림없이 거친 항의가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성경의 이미지에 그런 현대적인 방식을 덧입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혼란을 야기시킬 뿐이며, 절대 환영받지 못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현대 세계의 것과 뒤섞음으로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우리는 현재의 시각에서 옛 것을 보는 것을 진짜 피할 수 있을까요? 이번 부활절 공과에서 우리가 만난 주제는 성경에서 예수님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은유인데, 그것은 선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이 특정 이미지를 어떤 형태로든 보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문했던 대부분의 교회, 감사 카드, 예술 작품, 그리고 그 외 많은 다양한 장소 등입니다.
이상한 점은 목자들이 이 세상에 여전히 있지만, 목자와 함께 한 경험은 아이다호에서 카우보이와 함께 하는 것이나 또는 알래스카에서 이뉴이트 어부들과 함께 한 것만큼이나 우리 대부분에게는 낯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들과 별 상관이 없기에 그들의 직업과 일상이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자에 대해 아는 것보다 선생, 변호사, 의사, 사업가, 그리고 회계사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류는 오직 선한 목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치열하고 영원히 우리를 사랑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에 흥미를 잃었을까요? 조용하고 은밀한 순간, 우리는 우리를 보살펴줄 더 강하고, 더 현명한 누군가를 갈망합니다. 닐 플랜팅어가 썼듯이, 견고하고 좋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휴식을 방해할 걱정 없이 밤에 아늑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상포진으로 얼음이 얼지 않을까, 예보된 폭풍우가 몰아칠지, 공과금을 납부할 수 있을지, 국세청 직원이 세금 공제 한 건을 너무 창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아니, 어렸을 때 우리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침대에서 졸린 몸부림을 쳤고, 그래서 마음이 너무 바빠 잠을 잘 수 없을까란 걱정 없이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잠의 가장자리로 미끄러지듯 넘어가곤 했죠.
우리 어른들은 잠재 의식 속에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다시금 그런 추억을 갈망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안정감 없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그것을 갈망합니다. 우리는 병리학 실험실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더 가까워진 강력한 태풍을 지켜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양과 목자에 대한 우리의 익숙함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던 처음 독자들의 절실함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선한 목자의 필요성이 진정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늑대들이 으르렁거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돌봐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늑대들을 볼 수 있고, 하찮은 양 한마리라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던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지뢰로 가득한 삶의 풍경을 안전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비전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술과 유전 공학이 만들어낸 다양한 윤리적 수렁을 헤쳐나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보다 훨씬 더 현명한 사람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난해한 정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의가 거대한 강물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거리와 뒷골목에 흘러넘치는 더 나은 날을 향해 여러분을 인도해줄 믿을 수 있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 예수님께 현대적인 옷을 입혀보세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업데이트하든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모든 이들에게 목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요점
요한복음은 이상하게도 공관복음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많은 사랑을 받는 예수님의 비유들이 없습니다. 아마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예수님이 이미 말하셨던 위대한 이야기들을 세 번, 네 번 다시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요한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또 다른 경향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다”란 문구입니다. 신학자인 요한은 출애굽기 3장에서 처음 등장한 이 구절이 신성한 이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보냈다고 말하라”는 모세가 신성한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야훼가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을 열어 헬라어 문구인 ‘에고 에이미’란 문장으로 시작할 때마다 신학적으로 명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술에서 그 무게와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선한 목자처럼 많은 이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구절이나 이미지에 대한 설교에 활력을 불어놓는 한 가지 방법은 요한복음서와 예수님이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신 여러 곳에서 더 넓은 관점을 취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문, 목자, 떡, 길, 빛, 포도나무, 부활이심을 주장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몇 년 전 뉴스 프로그램 “60분”에서 가수 폴 사이먼은 사이먼 앤 가푼켈이 “디마지오 어디로 갔니, 한 나라가 외로운 눈을 당신에게 돌리네”란 가사가 담긴 상징적 노래 “로빈슨 부인”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마지오가 직접 사이몬에게 연락해 그 가사가 무슨 뜻인지 당혹감을 표현했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디마지오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그는 지금 미스터 커피의 대변인이었으니까요! 사이먼은 에드 브래들리에게 “그는 아직 자신을 은유로 생각하기를 시작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관찰입니다. 그러나 누가 자신을 은유적으로 생각할까요? “나는 세속주의 바이러스로부터 나의 가족을 지키는 항체다” 또는 “나는 우리 회사의 피스톤에 윤활유를 잘 발라주는 오일이다”와 같은 말을 자주 내뱉는 동료가 있나요? 누가 그런 식으로 말하나요?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C.S 루이스가 말했듯이, “나는 빛이다”, “나는 문이다”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 만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가장 중요한 사람이거나 수란이라고 주장하며 돌아다니는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요한복음10장은 매우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4장에서 말했던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도 중요해서 오직 그의 이름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이다”란 모든 말씀들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11-1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