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의 노래와 다르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은 전인적 사랑이 모든 종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요한일서를 “연애 편지”라고 부를 것입니다. 사실 이점이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의 주제입니다. 요한은 7절에서 곧 바로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원천이자 기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사랑의 본을 보여 주지 않으셨거나, 우리 안에 사랑을 심어 놓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최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때때로 사랑을 낭만적인 그리고/또는 정욕적인 감정과 혼동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보다 완벽하게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은 9절과 그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은혜롭게 창조된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조차 자연스럽게 사랑의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선물로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모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적어도, 경건한 사랑의 가장 커다란 요소가 자기포기와 희생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물론, 나이에 합당한 신앙을 가진 많은 어린 아이들조차 제가 방금 말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을 읽으면 읽을 수록 독자들은 더 탁한 물속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8절과 16b절에서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한 것의 의미를 궁금해 합니다. 요한이 자비나 은혜처럼 사랑이 단순하게 하나님을 특징 짓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이 용서와 인내로 행동하시는 것처럼 단순히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행동하신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청중과 대화할 기회가 있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은 요한이 하나님을 사랑”이다”라고 한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탐구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까지도 사랑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을 정의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특징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다른 모든 성품들의 요약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에 대해 이보다 더 포괄적이고 대담하게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 피조물을 포함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세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도 무조건적이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사랑하시고 누구를 사랑하시는지 판단해야 할 때조차 항상 사랑으로 하십니다.
그러나 사도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주장하면서 4장을 신비로 남겨 둔 것은 아닙니다. 12절과 17절에서 그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라고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NIV 성경은 teleiomenei를 “완전한”이라고 옮겼는데, 다른 번역들은 “완성된”으로 옮겼습니다. 이는 사도의 주장을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 없이도 이미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사랑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아마도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그 사랑을 재현할때 어떻게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사랑의 통로가 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실하게 경험하도록 돕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면에서 지극히 작은 자, 길을잃은 자, 원수가 된 자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Mr. George Floyd에 대한 살해 혐의로 Chauvin 경관이 유죄 판결을 받은 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이때 많은 사람들에게 요한일서 4장이 선포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중요한 시기가 될 것입니다. Chauvin의 Floyd 살해는 사랑의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가지는 급진적이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특징을 상기시켜 줍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선포할 때 주의 깊은 뉘앙스가 필요하지만, 요한일서 4장를 선포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Chauvin과 같이 스스로 우리에게 원수 된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청중과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는 Chauvin의 행위와 그와 유사한 행위들을 강력하게 증오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번 주일 서신서 공과의 세 번째 위대한 신비는 18절에 나오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와 관련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한이 teleiomenei(“완전한” 또는 “완성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위에서 언급한 악령을 불러일으킵니다.
18절은 완전한 사랑이 어떻게 “두려움을 내쫓는지”에 대한 또 다른 신비를 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일서의 선포자들은 exo ballo(“내쫓다”)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행위를 가리키는 ekballo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려움은 악령만큼이나 부자연스럽고 파괴적인 존재입니다. 두려움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두려움을 쫓아내십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동료가 완벽한 사랑과 두려움을 기름과 물로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무장시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역사를 은혜롭게 이루셨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이게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도 관련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 내쫓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또한 때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자극하는 이들에 가지는 두려움도 내쫓습니다.
요한일서 4장의 선포자가 청중과 함께 본문을 묵상할 때, 몇 가지 “핵심들”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대립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전의 반대편’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사랑에 너무 바쁜 나머지 하나님 사랑을 개발하는 데 실패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항상 함께 갑니다. 어느 쪽도 다른 한 쪽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성장은 항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을 점점 더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로, 즉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들로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 내는 우리의 모든 사랑은 우리가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롭게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올바른 선택이나 더 많은 노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칭찬 받을 만한 인간적인 프로젝트 그 이상입니다.
사랑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하나님으로 모방한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웃이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랑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도 아니고, 심지어 주된 이유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방식 때문에 곧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은혜롭게 부르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Bird by Bird: Some Instructions on Writing and Life’라는 자신의 책서 Anne Lamott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Spirit Rock 명상 센터의 Jack Kornfield가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여덟 살 소년에게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수혈을 받지 못하면 여동생이 죽게 될 것이라고 부모가 말했습니다. 부모는 또한 그의 혈액이 아마도 여동생에게 맞을 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좋은 헌혈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모는 그에게 혈액 검사를 해도 좋은지 물었고, 그는 그러라고 했습니다. 결과가 좋았습니다. 그들은 여동생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수 있으니 피 한 파인트(1 pint; 473ml)를 기증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밤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그는 부모님에게 기꺼이 헌혈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들것에 실려 여섯 살 된 여동생 옆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은 정맥주사를 맞았습니다. 간호원 한 사람이 소년으로부터 피 한 파인트를 뽑아 여동생의 정맥주사로 옮겼습니다. 소년은 여동생에게 피가 흘러 들어가는 동안 침묵했습니다. 의사가 그의 상태를 보러 올 때까지 소년은 들것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소년이 눈을 뜨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언제 죽나요?”
요한일서 4:7~2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