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관찰, 질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욥기서는 신론이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하나의 긴 논중입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이 질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화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마침내 하나님이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자들을 당혹스럽게 하여 경이로움, 신비, 경외감으로 대화를 끝맺게 합니다.
충분히 흥미롭습니다(비록 장들이 싸이면서 대화가 약간 지루해지더라도). 하지만 욥기서의 첫 두 장 반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난해한 대목입니다. 욥을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욥이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하나님의 허락 하에 더러운 일을 하는 “사탄”이란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독자인 우리가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욥보다 더 유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이 실제로 독자들인 우리에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사이의 우주적 게임에서 우리 삶이 체스의 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제게는 소름끼치는 쪽에 가깝습니다. 수년동안 저는 “왜 하나님은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많은 대답을 들었고, 그 중에 적지않은 답들은 불완전하거나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떤 식으로든 저에게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물론 제가 들은 몇 가지 답들은 더 옳은 것 같고, 적어도 하나님과 성경의 전반적인 증거에 대해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저에게 우리 모두 다 요점을 증명하거나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렇게나 던져진 주사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이 그렇게 일어난다고 제안했다면, 저는 단순한 불쾌감보다 더 심한 감정을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 무서워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욥기는 일상적인 천상의 세계에 대한 성찰이기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역사상 단 한 번만 일어났을 법한 시나리오에 가깝기를 바랄 뿐입니다. 욥이 주식 시장에서 재산을 잃었거나 그의 집이 불탔거나 심각한 피부 건선같은 마음의 상처를 겪었다면 그것은 한 가지 일이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열 자녀 모두 다 잃고, 모든 가축들이 죽고, 종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이 모든 것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욥기1-2장은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속이 매스꺼울 정도로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욥이 겪었던 재앙의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가 부인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은 그에게 일어난 것과 비슷한 일들이 여기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잃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한꺼번에 잃기도 합니다. 재앙과 질병은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찾아옵니다. 이런 혼란은 차별이 없는 것 같습니다. 허리케인, 쓰나미, 지진은 일반적으로 마피아와 마약왕 집은 무너뜨리지 않지만 교회, 유대교 회당, 모스크, 신자들의 집은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같은 대유행 전염병은 특정 회사의 기름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진 않지만, 친절하고 온유한 월급받는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재앙과 질병은 누구에게나 찾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욥기의 다소 골치아픈 천상 세계의 우주적 배경을 깎아내더라도 여전히 인간 조건의 고질적인 부분으로 보이는 매우 기본적인 시나리오, 즉, ‘왜’라는 질문은 당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남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비종교인은 그 질문을 던질 대상이 없지만, 종교인은 그 질문을 누구에게 던져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질문이 훨씬 더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럽지 않은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욥이 알았듯이, 우주의 중심에는 우리의 최선의 이익을 염두에 둔 하나님, 정의롭고 선하신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그러나 아마도 여러 줄의 끝에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것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만 창조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이 계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경우 그 고통은 실제로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탄식의 시들이 보여주듯이, “왜”란 질문을 하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용기있고, 대담하고, 지속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욥기2:10에서 욥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옳은 일을 옹호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니요, 이게 옳다고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욥기 나머지 부분은 욥의 인생에 일어난 나쁜 일들이 결국 우주적 계획에 어떻게 들어맞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지어내어 모든 것을 짜맞추려 시도하는 욥의 친구들을 보여줍니다. 모든 사건에는 어떤 것이든 깔끔하게 집어넣을 수 있는 창조와 신학 카테고리와 파일 서랍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접근 방식은 사물이 원래 그래야 한다고 말하려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삐뚤어져 보이는 모든 것을 측정하는 곧은자입니다.
욥은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욥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과 꼭 닮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창조물을 옹호하고, 하나님을 옹호하고, 있어야 하지만 너무도 자주 그렇지 않은 것을 옹호했습니다.
이것이 욥기,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경의 교훈인데, 교회에서 우리 중 일부가 너무 자주 잃어버린다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흔들리고, 그것을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근거로 사용하려고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최근에 찰스 다윈을 괴롭혔던(그가 믿어야 한다고 했던 하나님의 선함에 의문을 품게 만든) 자연의 한 측면이 바로 말벌의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 특정 종의 말벌은 어떤 종류의 유충 안에 알을 낳습니다. 애벌레가 유충 안에서 자라면서 숙주의 내부 장기조직을 먹어치웁니다. (영화 에일리언을 본적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매우 영리한 방식으로 내부 장기를 먹어치운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적어도 한동안은 없어도 되는 장기조직부터 먹어치웁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더 중요한 장기조직-이것이 없으면 결국 숙주를 죽게 만드는-을 남겨둡니다.
다윈과 같은 사람들, 최근에는 리차드 돕킨스 같은 작가들은 이런 역겹고 불쾌한 광경을 보고서 이것은 신이 이 세상을 설계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합니다(만약 이 끔찍한 말벌 번식 메커니즘을 신이 설계했다면, 그는 매우 역겨운 신임에 틀림없다는 주장). 지금의 세상은 신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명백한 설계 결함을 증거로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지금의 세상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필수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해 왔습니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일이 구세주의 필요성과 만물의 새로움, 우주 구조 작업의 필요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욥이 이해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며, 어쩌면 우리도 욥기와 같은 까다로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일지로 모릅니다. 때때로 경건한 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아니요! 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아요. 하나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기서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의 정확한 의미가 욥의 이해를 넘어선다는 것을 욥에게 알려주십니다. 욥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그의 저항 한 가지만은 하나님이 동의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테런스 말릭의 웅장한 영화, “생명의 나무”는 욥기를 모티브로 제작된 것입니다. 영화 첫 장면은 욥기38장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모든 천사들이 즐거이 소리지를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그러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추면서 영화 속 주인공이 “신이여 어디에 있습니까? 왜?”라고 질문하는 것을 듣습니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욥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에 이르러 거의 15분동안 마리아의 눈물을 연상시키는 라크리모사가 치솟는 장엄한 이미지가 이어집니다. 욥기에서 우주 여행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모든 “왜”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영화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주가 어떻게 아름답고 장엄하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여행은 우리 너머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려는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듭니다.
저는 욥기의 신비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이 영화의 장면을 시청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 영상은 설교의 일부로 사용될 수 있지만 요점은 우리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작게 만드는 우주의 웅장함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성취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말씀을 하실 것이며, 그것은 선한 말씀일 것이며, 우리의 모든 질문에 가장 확실하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욥기 1:1, 2:1-1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