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첫째 주일과 둘째 주일은 그 이미지는 바뀌지만 메시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2장에 등장하는 산과 군대의 이미지에서 이사야서 11장의 식물과 동물과 어린아이의 이미지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지상에 정의와 평화가 있을 날을 약속합니다. 이사야서 2장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덜 분명한 반면, 이사야서 11장은 아주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거의 믿을 수 없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더 정확히 말하면 유다는 격동의 시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북왕국은 해체되어 추방되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바벨론의 세력이 곧 앗수르를 대체할 것이지만, 여전히 앗수르의 정복자들은 유다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내에서 소심하고 무능한 다윗 계열의 왕들이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번영의 시대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안녕과 안정감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 가운데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우울하고 절망적인 운명을 예언하고 있지만, 때로는 빛과 희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에서 선지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 즉 이스라엘에 더 이상 다윗의 후손이 왕위에 있지 않게 될 때, 곧 다윗의 가계가 잘려지는 때를 미리 내다 보고 있습니다. 그 죽은 그루터기에서 다윗의 새로운 후손이 나올 것인데, 그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두 번째 다윗(이새에 대한 언급으로 미루어 보아)입니다. 이 새로운 싹 또는 가지는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입니다. 그는 다른 모든 다윗 가문의 왕들과, 그 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인간 지도자들이 되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한 그런 인물이 되고 그런 일을 하실 것입니다. 이 분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이 가지가 주님의 성령으로 영원히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구속 사역을 시작하신(눅 4:1) 예수님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들과 현대 세계의 “왕들”과는 달리, 이 왕의 가지는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열 수 있게 하는 모든 자질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은 그에게 왕국을 다스림에 있어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분별력을 부여할 것입니다. “모략과 재능의 영”은 그가 나라를 다스림에 필요한 외교 및 군사적 권위를 줄 것입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를 하나님과 늘 가까이 있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지적인 옳음이나 진리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유대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지도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달리 여호와의 중심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는 순결하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분명히 이 본문은 인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이러한 성령의 6가지 은사 때문에 이 이새의 가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로 충만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의 더러운 누더기나 부유한 자들의 호화로운 옷이든지 간에 외모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는 완전한 의로 두 가지 일을 행할 것입니다. 모든 시민이 지도자에게 바라는 두 가지 일, 즉 가장 작은 자들에 대한 부드러운 보살핌과 가장 악한 자들에 대한 엄한 처벌입니다. 희생자를 돌보고 포식자를 돌보십시오. 선지자는 모든 선량한 시민이 묻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를 당하고 악인들이 떠나갈 것입니까?
물론 모든 시민들이 이 도시의 새 왕의 이러한 우선 순위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궁핍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정치적 의제에서 자유주의적인 편에 속하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우선 순위는 정치적 의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약 전체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의제입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까지도 계속됩니다—누가복음 4장의 첫 번째 설교 참조). 이 메시아 왕은 자신의 모든 의(히브리어로 미쉬파트)와 정의(히브리어로 체다카)를 사용하여 가장 작은 자들과 끝에 있는 자들이 부숴지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악인을 죽이신다는 이 생각을 주저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2장은 하나님께서 열방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공의를 사용하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강조점은 땅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선하시고 너무 의로우셔서 완고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악한 사람들이 아무런 결과도 없이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결과는 항상 “죄를 지은 영혼은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죄인이 자기 길에서 돌이켜 이 의로운 가지에 치료제를 마련하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 의로운 가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루터기에서 나온 이 싹은 그의 출생과 외모가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다스림은 놀라울 것입니다. 왜냐화면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의와 성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런 지도자를 본 적이 없지만, 이러한 한 사람을 죽기까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런 사람이 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가 오시면 상상할 수 없는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도록 매혹적이고 영감을 주는 그림 언어로 “평화로운 왕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2장처럼 평화로운 나라들 대신에 우리는 평화로운 자연을 봅니다. 자연은 더 이상 “이빨과 발톱이 붉”지 않을 것입니다. 샬롬이 회복된 창조 세계가 될 것입니다. 적자생존은 포식자와 먹이가 함께 먹고 자는 평화로 대체될 것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육식 동물의 소화기관이 어떻게 식물성 식단을 소화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아닙니다. 그는 이 동물의 이미지를 통해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어린아이라는 주제를 세 번 반복함으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신학적 요점을 9절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인간의 타락과 함께 세상에 들어온 폭력적인 죽음이 이새의 가지가 가져올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신학적 요점은, 죽음은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로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엄격한 진화론자들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죽음이 죄로 인한 일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성경의 많은 가르침과 동일한 선상에 서 있습니다. 죽음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함께 살아 온 삶이 우리의 경험이든 과학 실험실에서 보아온 것이든 우리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은 죽음이 없는 평화를 가져올 것이며, 죽음이 없는 이 평화는 그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만큼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세상을 본 적이 없지만 선지자는 우리에게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일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이 작은 싹을 통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이 부분의 예언은 9절로 끝나지만, Lectionary는 여기에 10절을 더합니다. 10절은 사실 남은 자의 귀환에 관한 다음 단락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10절을 추가한 것은 기쁨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동물의 왕국에서 멈추지 않으실 것임을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열방 가운데 깃발을 세우심으로 모든 열방을 자기에게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온 싹은 파편화 된 세계를 자신에게로 결집시키기 시작하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모든 나라와 족속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1:10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Reinhold Niebuhr의 유명한 격언인 “평화를 원한다면 정의를 위해 일하라”는 말과 같이, 많은 설교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정의와 평화를 구하도록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한 요청은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이고 전파되고 실행되어야 하겠지만, 이 본문은 행동을 촉구하거나 불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영생의 구절들은 단지 무조건적인 좋은 소식을 전할 뿐입니다. 실패한 지도자와 불의와 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선지자는 언젠가 세상에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가져올 지도자가 올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일이 대체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 대림절에 우리는 그가 한 번 오셨고 그의 일을 마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임을 상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화 아이디어
서방 세계의 정치적, 군사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지도자를 찾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지도자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이 본문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강한 지도자 혹은 자비로운 지도자를 찾습니까? 거친 지도자 혹은 부드러운 지도자를 찾습니까? 혹은 지적 기량을 갖춘 자 혹은 감성적인 지식을 갖춘 자를 찾고 있습니까? 새로운 플랫폼을 지닌 지도자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련의 약속을 하는 지도자, 혹은 이미 실력이 입증 된 경험 많은 지도자가 매력적이십니까? 나이가 중요합니까, 성별이 중요합니까, 성장 과정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교우라는 사실이 중요합니까? 그 사람의 경건함이 당신을 변화시킬 것입니까, 아니면 정치적 통찰력에 집중할 것입니까? 당신의 특정한 관심사를 추구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훨씬 뛰어 넘는 비전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투표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에게 투표하시겠습니까? 지도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새의 가지로 보내신 분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사야 11:1-1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