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0:4-9a 주석

몇 년 전 제 아들이 8학년이었을 때, 그의 기독교 학교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의 채찍질 장면을 보도록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실제 비디오 클립을 보기도 전에 (결국 그 클립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고통에 대한 그 선생님의 다소 생생하고 유혈이 낭자한 묘사는 학급의 한 아이를 기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영화를 보셨다면, 채찍질하는 장면이 성경의 증언을 훨씬 넘어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대부분의 복음서에서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 하도록 했다”라는 단 한 구절입니다). 고문을 담당한 로마 병사가 더 치명적인 채찍질 도구를 계속 사용하려고 손을 뻗는 장면은 극도로 길고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며, 못, 뼈 조각, 그리고 공포영화에서 조차 나오기 힘든 몇 가지 다른 것들이 박힌 악몽 같은 채찍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 일부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용감한 예수”의 묘사였습니다. 채찍질이 진행됨에 따라,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으로 인해 무릎을 꿇게 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몇 번은 병사도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하여 그만두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은 영웅적이고 단호하게 다시 일어서시더니 턱을 살짝 내밀고는 본질적으로 “계속해 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병사는 이에 순응하고 무자비한 구타를 계속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사야 50장의 말씀을 재현해 내는 모습을 상상해야 합니까? 어쨌든, 이 구절은 여호와의 종이 지극히 순종적이며, 심지어 그의 수염을 뽑고 그의 등을 때리려는 사람들을 향해 “부싯돌처럼” 얼굴을 내밀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멜 깁슨은 그 채찍질 장면에서 반항적인 예수를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피학대 음란증 환자도 아니었고, 거만한 영웅으로서의 자세를 취하지도 않으셨으며, 가슴에 여러 발의 총알을 이미 맞고도 계속 총을 쏘는 병사처럼 행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그 시점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50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이 고통 중에 겪으셨던 가장 확실한 특징인 의에 대한 감각, 그분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계시다는 감각, 그리고 그분의 순종의 최종 결과가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될 것이라는 감각입니다. 그러한 감각이 예수님을 깁슨 씨가 묘사한 것과 같은 괴력사의 이미지로 이끌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의 온전한 인성은 그분이 실제로 고통 중에 부르짖으셨고, 아마도 그분께 가해진 구타로 인해 움츠러들었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분에게 침을 뱉고 그분을 조롱할 때 그분이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예수가 그 모든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으로 상상함으로 가현설에 빠지는 잘못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함을 알고 계셨다는 것, 이러한 형벌이 자신에게 합당하게 가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가 고통 속에서도 어느 정도라도 견딜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분이 성령과 아버지에 의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성부께서 예수와 함께 계셨으며, 그분에게 겟세마네에서 그 잔을 받아들이고 거짓 비난에 맞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이 끝나가고 성주간 동안 예수의 수난이 중심 무대에 서면서, 우리는 그 모든 용기와 확신의 이유가 바로 예수가 우리 나머지 사람들의 죄와 악을 짊어지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고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의고통과 치욕을 견디심을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정확히 찾아내지 않고는 축하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50장 4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택하신 종에게 “피곤한 자를 붙들어 주는” 말씀을 주셨다고 알려 줍니다. 그 말씀은 예수를 지탱해 주었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이 지친 세상에서도 우리를 지탱해 줄 복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진리입니다. 이사야 50장에서 그 종이 말씀하시는 용기와 확신과 불굴의 의지는 그 자체만으로 칭찬을 받을 목적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섬김이며, 우리 자신은 그런 힘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쏟아질 수 있는 모든 비난도 피할 힘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는 주장할 결백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택하신 종, 모든 긍휼의 하나님에 의해 참으로 입증되신 분의 영광스러운 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크레이그 반즈(Craig Barnes)는 그의 저서 ‘집을 찾아서(Searching for Home)’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삶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만, 더 나은 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에 탐닉함으로써, 소비자 지출을 증가시킴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약을 시도함으로써, 직업을 바꿈으로써 그들의 삶의 구멍을 메우려고 계속 노력합니다. 그러나 물론, 그 중 어느 것도 오래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즈는 사람들이 삶의 바닥을 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는 고통이 더 이상 없을 때를 갈망하는 대신, “어쩌면 내일은 조금 덜 고통받을 거야”라는 은밀하고 체념적인 바람외에 더 큰 희망을 허용하지 않고 삶을 살아갈 때라고 관찰합니다.

그런 체념한 태도는 고통이 최후의 발언을 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암울한 믿음 속에서 더 많은 고통을 낳을 뿐입니다. 복음은 또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고난은 소망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우리가 고통을 조금 덜 겪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더 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쪼그라든 희망이 아닙니다. 대신, 예수께서 우리같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옴으로써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도 평안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오는 영광의 소망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