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2:7-10 주석

복음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몇몇 설교자들과 교사들의 발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큰 발, 작은 발, 평 발 등등 각각 모양이달랐습니다. 악취가 날 수도 있겠다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 그 누구도 “아름다운” 발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 입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 누구도 그들의 발을 감출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이사야 선지자와 바울 사도는 “아름다운” 발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발을 설명할 때 육체적인 발 모습을 문자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와 바울은 복음의 교사들과 설교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의 첫 청중들이 좋은 소식이 간절히 필요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잔인한 애굽과 앗수르에게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바빌론에서 포로살이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 군대들이 쳐들어와 거룩한 예루살렘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도 목격했었습니다. 탈약자들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노예의 멍에를 지웠고 그 원수들이 마치 소의 무리를 대하듯 그들을 포로로 팔아 버렸습니다.

더우기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대적들로 나타나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해하였을 뿐 아니라 계속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이사야서의 본문을 누가복음 2장과 연결해서 볼 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좋은 소식이 간절히 필요 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0에서 천사가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두려워 말라. 모든이들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라고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목자들을 포함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바빌론의 발밑이 아닌 로마의 권세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악으로부터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할 구세주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해줄 천사의 발이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에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여러 이들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탄압의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이들이있는가 하면 가난과 무관심 그리고 인종 차별에 이르기 까지 여러가지 문제들로 신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슬프게도 빚과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끊임없는 쾌락을 추구함에 스스로를 노예처럼 팔기도 합니다.

거기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 가운데 하나님의 대적처럼 행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거짓 종교를 따르거나 갖가지 우상이나 스스로 만든 신들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이름은 짜증날 때만 부르거나 이기적인 이유에서만 하나님을 찾는 시도를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들은 어떤 면에서 나쁜 소식을 먼저 선포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아닌 대적의 관계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죄악된 언행과 부실함이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음도 전합니다.

그러기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은 하나님의 입양된 자녀들을 향해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은혜를 덧입어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입양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원하시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그 은혜를 바라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발은 하나님과의 화평 뿐 아니라 우리 서로 간에도 화평하도록 이끕니다. 우리로 서로 화해할 것을촉구하여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좋은 소식을 증거하도록 합니다 (눅 2:10).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과 화해케 되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같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피가 과거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벽들도 허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평가운데 함께 살며 예배하도록 은혜로 자유케 하신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설교자와 교사들은 가장 곤고한 죄인들 조차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노약과 질병, 외로움과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우리는 병원이나 장례사, 무덤과 같은 곳들에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발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좋은 소식은 너무도 귀한 소식이라 많은 “발들”이 필요합니다.좋은 소식은 많은 메신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기에 목사들과 직분자들 뿐 아니라 성도들 모두 함께 구원의 좋은 소식을 그리스도인들과 아직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전합니다. 함께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여러 유형의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의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함께우리는 기쁨으로 외칠 수 있습니다. 함께 노래로 찬양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송축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혼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 앞서 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으로 이미 앞서서 가신 그 곳을 갑니다. 주께서 우리 앞서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우기,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할 때 예상치 못하는 공격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행자뿐 아니라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호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지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두 예비해 놓으신 길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Christianity Today 잡지 2000년 10월 23일 편에서 편집장 David Neff는 “Beyond Self-Help Chatter” (자기 계발 이야기를 넘어서) 라는 글을 통해 그 다지 아름답지 않은 발을 가진 설교자 두 명을 묘사합니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휴가 때, 한 교회를 방문했었다. 주류 교단의 교회 였는데 매주일 예배 때 교회 달력에 따라 설교할 성경 구절이 이미 정해져 있는 전통을 따르는 교회 였다.

설교할 성경 구절이 이미 정해져 있는 전통은 설교자가 자신이 정한 본문이 아닌 주어진 그 본문을 깊이 연구 묵상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그 의도가 최고로 성취되고 가치가 있다. 그런데 반대로 최악의 경우는 설교자가 그 본문안에서 어떤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농담이나 도덕적 교훈, 자기계발과 관련된통찰을 나눈다든지 심지어 정치적 어젠다로 연결시킨다든지 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방문하였던 그 교회 주일 예배가 최악의 경우 였다. 교회력에 따라 삼위 일체 하나님을 송축하는 주일 이었다. 구약본문은 출애굽기 3장의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와 모세의 이야기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맺은 언약을어떻게 성취하실지 모세에게 드러내시고 그 약속을 다시 새롭게 확인하실뿐 아니라  당신의 놀라운 이름을 계시하시는 본문이다. 성경에서 구원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교회 설교자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역사의 전환점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단계들에 대해서 말했다. 모세가 자신앞에 놓인 인생의 다음 단계의 문을 들어가길 두려워 했지만 결국 통과 했다고 말했다. 우리도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문들을통과 해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설교를 마쳤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구원 계획의 계시도 하나님의 임재도 없이 그저 우리 인생의 단계들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다.

주보에 보니 그 다음 주일에는 다른 설교자가 온다고 해서 다시 와 보기로 했다. 그 다음 주일의 구약 본문은 욥기에서 회오리바람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욥기 38장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바다의 문들을 간수하여 파도들이 오고 감을 다스리며 바다의 지경들을  누가 정하였는지 묻는다.

신약 본문은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놀란 제자들이 “이는 누구인가 바람과 바다까지 순종하는도다” 하며 감탄하는 내용이다. 주보에는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모든 만물의 주이심을 나타내심” 이라고 본문에 대한 간단한 부제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설교자도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여행할 때 겪는 불안함과 연관을 시켰다. 한 비행 공포증이 있는 여인이 같은 비행기 안에 주교가 세명이나 타고 있는 줄 모르고 계속 두려워 했다는 농담까지 하면서 말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완전히빗나간 이야기였다. 그 다음 주일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Neff 는 많은 복음주의 설교자들이 본문들의 의도와는 다른 유치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애통해 하면서 특히 번영신학과 관련하여 인간의 행복과 부에 호소하는 설교자들을 나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