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8:1-9a(9b-12) 주석

여러 해 동안 글을 쓰고 몇 권의 책을 내면서, 나는 편집자들과 이제는 친구가 된 교수님께로부터 문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교수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영어 문법을 가장 잘 아는 분입니다). 덕분에 나는 이제 거의 대부분 경우에 “that”과 “which”를 구분하는 법을 알아냈고, 현수 수식어와 주어를 수식하지 않는 분사구문 문제를 발견하는 데 꽤 능숙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다 타버렸지만, 그래도 아빠는 토스트를 드셨다”는 문장처럼, 아빠를 다 타버린 사람으로 만드는 웃긴 문장들 말이죠).

내가 배운 또 다른 점 중 하나는 많은 편집자들이 “비꼬는 따옴표”(Scare quotes)의 남용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꼬는 따옴표”란 어떤 단어나 구를 인용부호로 감싸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단어나 구가 실제로 누군가의 말이나 출처에서 온 정식 인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저자가 “비꼬는 따옴표를”사용하는 이유는 “이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요. 나는 여기서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어요”라고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친구 나오미가 중국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걱정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쇼핑 습관에는 그것이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이럴 때 누군가에게 (말 그대로가 아니라 살짝 비꼬는 의미로)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아, 그 나오미 말이죠, 그녀는 진정한 노동법 ‘옹호자’죠.” 여기서 “옹호자”라는 단어 주위의 따옴표는 불신과 반어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오미가 노동자를 위해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글쓴이는 그 단어를 비꼬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죠. (때로는 설교가도 설교 중에 공중에 따옴표를 그리면서 이와 같은 효과를 의도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많이 쓰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비꼬는 따옴표”를 아무 이유 없이 남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먹은 건 ‘슬로피 조(sloppy joes)’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말은 이 사람이 진짜 “슬로피 조”를 먹은 게 아니고 다른 걸 먹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말해주기 싫으니, 그냥 그걸 슬로피 조라고 부른다는 뜻일까요?

만약 제가 이사야 58장을 살펴본다면, 저는 여러 곳에 “비꼬는 따옴표”를 적절히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로 “금식”이라는 단어 주위에 넣겠죠.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아, 내 백성들아, 너희 정말 ‘금식’을 잘하고 있구나?!” 그리고 조금 지나서 하나님은 진정한 금식이 무엇인지 다시 정의하십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진정한 “금식”(“비꼬는 따옴표”)은 정의롭고 공평한 삶을 사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 이 장에는 아이러니와 하나님의 어이없는 눈초리가 가득합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이 장은 너무 비극적이어서 웃을 수는 없지만, 사실 정말 웃기고 황당한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금식을 지키며 뿌듯해하면서도, 직장에 가서는 직원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황당한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금식이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게 해주는 면죄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보다 더 터무니없는 광경은, 금식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뷔페로 달려가 마지막 남은 에그롤을 차지하려고 서로 주먹다짐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 모든 금식과 가짜 겸손은 전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한 행동만 보시고, 다른 모든 일들은 못 보시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오늘 금식 완료” 라는 스티커를 옷깃에 붙이고 나타나면서,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번영과 행복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문자 그대로의 금식을 다 생략하고 진정한 금식을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금식이란 억눌린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노동자를 공정하게 대하며, 배고파 굶주린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살아라. 레위기와 신명기를 다시 읽어보고 와서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너희의 모든 종교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은 내게 역겹기만 할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신앙의 모든 예식과 경건한 행동들을 다 하면서도, 그것을 삶의 다른 영역과는 완전히 단절시켜 놓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맹점,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볼 때, 우리는 수많은 종교적 행위를 하면서도 교회 밖의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이어지지 않을 때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의한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예배 의례를 지킬 수 있고, 그러면서도 우리의 예배와 사회 부조리 사이의 상호 모순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지닌 분명한 의미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주신 진리에 눈이 멀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주일에만 계신 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우리의 삶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분으로 여기게 되는 걸까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며,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진정한 겸손과 진심 어린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세상의 정치나, 좌우 어느 편의 견해, 혹은 뉴스에 등장하는 평론가들의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기준이며, 우리의 길잡이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겸손함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잘못된 길로 가는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주일 예배 때 고백하고, 노래하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그 모든 것이 예배당 밖의 삶 속에서도 실제로 드러나게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본문 순서에서 오늘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제자들에게 더욱 철저하고 깊은 헌신을 요구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릇된 자기의에서 비롯된 열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전한 감사에서 비롯된 마음입니다. 바로 이 피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온전히 이루신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인 것이죠.

예화 아이디어 

몇 해 전, 닉슨 대통령의 비밀 녹음 테이프 일부가 추가로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이때 공개된 녹음 속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목소리도 담겨 있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매우 신랄한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발언은 그동안 그가 공적으로 보여주었던 유대인과의 대화와 협력에 대한 열린 태도와는 전혀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지극히 비기독교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레이엄 목사는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가 평생 전해 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 죄 또한 용서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일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레이엄 목사의 발언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뉴욕 타임스에 실린 한 칼럼이었습니다. 그 글의 필자는 닉슨의 법률 고문이었던 레오나드 가먼트였는데, 그는 뜻밖에도 그레이엄 목사를 변호하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가먼트는 이 사건의 진정한 비극은 그레이엄 목사가 공적으로 망신을 당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경계가 무너진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레이엄 목사의 사적인 반유대주의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보였던 긍정적인 태도와 행동은 여전히 동일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사적인 영역은 보호되어야 하며, 공인을 평가할 때는 공적인 행위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레이엄 목사의 사적인 말을 들은 뒤 그의 공적인 행동까지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공적인 자리에서 다르게 행동하더라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먼트의 주장은 자유 사회의 운영 원리로서는 일리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적인 말과 공적인 행동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적으로는 유대인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공적으로는 그들을 친구로 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는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위선”입니다. 위선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적인 생각과 공적인 행동을 분리한다면 위선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그와 함께 진정성 또한 불가능해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