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1장 10절-62장 3절 주석

우리가 이번  교회력 독서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기반해서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후 첫 번째 주일에 속하는 지속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문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은 이사야61:1-3과 8-11절에 집중할 때인데, 두 주일 전에 우연히 발견했던 것으로, 대명사 “나를”과 “내가”란 선행사들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누가 과연 이 구절들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크게 즐거워하며….” 본문을 기록한 선지자입니까? 아니면 선지자가 시온인 예루살렘, 인격화된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입에 넣어준 것일까요? 아니면, 수백년을 뛰어넘어 메시야 또는 메시야 공동체의 말일까요? 학자들은 이 독서의 화자의 정체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이 읽기의 경계가 어색하다는 점입니다. 자연스러운 구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0-11절은 이사야 61장의 선행 구절들에 속합니다. 그리고 62:1-3은 이어지는 구절들의 부분입니다. 교회력은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 두 장들을 나누어놨습니다. 이 단락을 어색한 본문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 대명사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력을 만든 이들이 이렇게 본문을 나눌만한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두 장들로부터 어떤 구절들을 합쳐놓은 것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문제를 반영하기 위함입니다. 포로 후기 유대인 공동체가 겪었던 문제와 같습니다.

좀 더 담대하게 말한다면, 크리스마스 후 이틀이 지난 그때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땅에서는 평화로다”란 외침과 함께 성육신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던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은 크리스마스 전날에 있었던 현상과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을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이 땅은 구속되지 못한 것같아 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 즉 고대 이스라엘이나 오늘날의 교회마저도 선지자들과 천사들이 선포한 영광스러운 구원의 장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분이 나타나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죄와 오류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 우리의 독서가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구원의 특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이사야61:10-11은 이미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사야 62:1-3은 “의가 새벽 같이, 그 구원이 횃불 같이 빛나느니라”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지금 당장, 구원은 정원의 토양에 심은 씨앗 같이 숨겨져 있습니다(61:11). 그러나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보여질 날이 올 것입니다(62:2). 이것을 바울 용어로 한다면, 의가 왔지만 영광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로마서8:30).

하지만 본문의 역사적 정황을 건너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미와 아직” 이라는 구원의 완벽한 예증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또는 남은 자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기뻐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을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결혼식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본문의 “나”는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신분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버림받은 자”라 불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황무지”라 불려지지 않았습니다(62:4). 그들은 여호와와 맺은 결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소원해진 부부의 화해라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너무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회복이 완성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가 명백히 밝혔듯이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침략자들에 의해 황폐화된 땅에는 치워야 할 잔해들이 많았고, 재건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며, 다시 심어야 할 일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10절의 “나”는 이 회복이 곧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결혼 이미지에서 농업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선지자는 확신을 갖고서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왜소함만을 보는 열방의 눈에는 경멸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여호와는 이스라엘 안에서 시작한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소망해야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재건된 예루살렘은 기억 속에 있는 황금 도시에 비해서 초라한 대체물일 수 있지만, “나”는 단순히 상황을 한탄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완성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잠잠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온의 의가 새벽 같이 빛나고, 횃불 같이 빛날 때까지 말입니다.”

여기에서 의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물리적 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하나님은 영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 때에 마음에 두셨던 것입니다. 만민을 여호와께로 인도하는 의의 빛나는 도시,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가는 길을 비추는 거룩함의 횃불로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의와 거룩함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되돌아온 시점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들을 재창조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민이 그들 안에서 하나님을 보도록 영광과 영화로 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말하기를, “나는 계속 기도할 것입니다. 현재가 아무리 암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나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믿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사야 62:2-3에서 백성들의 기도를 격려하는 방식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일하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이 본문이 어떻게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들뜬 마음과 찬양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시므온과 함께, “우리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만민 앞에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눅2:31-32)

하지만 너무도 많은 나라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진채 어두움 속에 잠겨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영광을 본 사람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재건된 예루살렘처럼 초라하고, 옛 죄의 잔해, 새롭고 오래된 태도와 행동들로 기워져 있을뿐 아니라 사랑, 기쁨, 평화의 열매로(갈5:22) 채워지지 않은 들판과 과수원들과 같습니다. 세상은 분쟁과 이기심으로 분열된 교회를 보면서 자신들과 같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다는 우리의 외침을 비웃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의 성육신 후 이틀, 천사들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 외친 후 이틀, 하나님이 세상을 진동시킨 후 이틀, 그러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구원의 옷을 입었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12사도들과 그들의 동료들이 뿌려놓은 구원의 씨앗들이 지구 끝까지 이를 정도로 전세계적인 수확을 거두고 있습니다. 교회의 의와 찬송은 많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왔으며 세상은 이전보다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정부, 과학, 건강 돌봄, 교육, 인권의 진보가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교회의 선포와 행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민첩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모호하고 방해가 되고, 의만큼이나 죄도 범해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인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그의 일을 완성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해내실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고 행동하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이미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할 세상은 아직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후 첫 번째 주일을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젊은 커플 결혼식 주례를 막 마쳤습니다. 사랑이 식을지라도 신실하게 살아갈 것을 약속한 오랫동안 키워온 사랑과 순수한 서약의 축제였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의 결혼식이 그들 삶의 끝이 아니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 전 상담에서 나는 그들의 결혼에 대한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신부가 대답하기를, “힘들고 고생스럽겠지만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들은 이미 결혼했지만, 성숙한 결혼 생활을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함께 했지만, 충만한 의미로 온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결혼식이 결혼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성육신 홀로 구원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한 속죄가 있습니다. 교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한 회복이 있습니다. 완성은 성육신하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그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