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위한 구약 성경 읽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즐거운 단편 시입니다. 단정하고 깨끗하고 사랑스러워 이번 성탄 시즌에 완벽하게 들어 맞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그 맥락이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고 않고, 사랑스럽지 않다는 점입니다. 친절하시고 찬양하기에 마땅한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이 설명은 공동체 애가의 일부으로서 구원을 위한 기도의 일부입니다(이사야 63:7-64:12). 그리고 이 구원의 노래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선민을 대적하는 열방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에돔을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피비린내 나는 그림이 있습니다.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3절).
그 모든 유혈 사태 직후 시인/선지자는 “여호와의 자비”에 대해 말합니다. 이러한 병치가 거슬리긴 하지만 이사야서와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있는 심판/구원의 패턴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부드러우실 수도 있고 거치실 수 있습니다. 자비로우시지만 부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분(변덕스러운 하나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히브리어, 헤세드)으로 이스라엘에게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3). 수세기 동안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의미했고, 이스라엘의 죄악된 반역은 그들에 대한 엄한 징계와 뒤이은 사랑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수세기 동안 그들에게 보여주신 모든 친절하심을 징벌로부터 회복된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본문의 연대나 저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분분합니다만, 저는 여러분이 저자가 아니라 단어에 초점을 맞추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기억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친절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한 실제 행하신 역사적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그 모든 선한 행위의 중심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후손들과 언약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내 백성이다.” 그 모든 것들은 언약 맺음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이사야서 63장의 후반 구절은 출애굽을 하나님의 가장 극적인 구원 행위로 회상하고 있습니다(참조, 11-13 절). 그리고 하나님은 광활하고 들짐승들이 울부짖는 광야를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면서 통과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13-14절). 그리고 이사야서의 오늘 특정 본문의 연대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이 선지자의 마음에 “여호와께서 찬양을 받으실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이 본문을 크리스마스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선행하는 모든 것의 예표이자 그림자인 궁극적인 구원 행위였습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신 “임마누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가족으로 택하셨을 때 그들이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가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8절). 그러나 슬프게도, 이 탄식의 기도가 사64:5b-7에서 고백하듯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죄 많은 자녀들에게 매우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그들을 다시 구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구주가 되심으로써 결정적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역사에 대한 이 고대 기록은 특히 우리 구주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독특하고 극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축하를 계속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9절 상반절은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환난”을 “고통”이나 “억압”으로 번역하여 하나님이 어떤 깊은 방법으로 우리의 문제에 개입하셨다고 제안하지만 저는 “고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괴롭하는 문제들로 인해 고통 당하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싸움에서 멀리 떨어져 앉아 계시지 않고 우리를 그 싸움에서 끌어내시기 위해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으시며 우리의 감정적 혼란과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십니다. 나는 이 “고통받는 하나님” 주제가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어, 그는 “울었고”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성탄절 후 첫 번째 일요일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던 구세주를 경축합니다.
9절의 다음 문구는 수수께끼 같지만 설교적으로 유망합니다.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출애굽기 23:20-23에 대한 언급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의 천사를 따라 광야를 통과하여 그 천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3:14, 15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약속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첫 번째 본문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가 현장에 나타나는 신비한 장소 중 하나가 아닌 한 천사에게 기도하라는 명령 때문에 당혹스럽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되기 오래 전에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의 사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이제 물론 성탄절 이후 여호와의 임재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계속해서 쌓으면서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Stephen Reid는 “하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친숙한 말을 놓고 경쟁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잔인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날, 이사야는 모든 드라마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거친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부드러운 이미지, 즉 아이를 안고 긴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나중에 이 길고 슬픈 탄식의 기도에서 이스라엘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63:16)”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독한 죄를 지었고 주께서 심히 벌을 주셨을지라도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사64:8).”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부드럽게 안아주시는 이 그림은 피곤하거나 슬프거나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할 것입니다. 그 옛 기억은 특히 선지자가 다음 문장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기억과 여호와의 강경한 대응을 언급할 때(10절) 이스라엘에게 힘을 줍니다. 결국 우리 구세주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아주 장난꾸러기였을 때에도 그들을 품에 안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 사랑스러운 구원 역사의 단편은 복잡하고 어려운 맥락에서 설정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크리스마스도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그 작은 아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축하하고, 깊이 축하를 하기 위해서는 그가 들어온 어둠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복합적인지 기억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은 더욱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하나님의 거치심과 부드러움, 그분의 사랑과 성경을 채우는 폭력의 혼합은 우리의 믿음에 도전하고 성경의 거친 가장자리를 면도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폭력적일 수 있습니까? Liam Neeson 주연의 영화 ‘Taken’을 보고 이 문제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전직 CIA 요원의 사랑스럽지만 어리석었던 십대 딸이 유럽으로 휴가를 갔다가 성매매범들에게 납치되는 과정을 그린 극도로 폭력적인 영화입니다. 소녀가 아빠와 통화하던 전화기를 떨어뜨리자 납치범이 그 전화기를 줍습니다. Neeson은 그의 숨소리를 듣고 딸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일은 잊고 보내줄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찾아내어 모두 죽일 것이다.” 비웃는 유괴범은 웃으며 “행운을 빌어요”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Neeson에게는 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결국 성매매 갱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죽고 Neeson은 딸을 건져냅니다. 마지막 장면은 안도감에 흐느끼는 그의 딸을 품에 안은 채 끝납니다.
영화는 많은 교회 참석자들에게 너무 폭력적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끔찍한 위험에 처해 있다면 어디까지 구해야 할까요? 내 사랑이 나를 폭력적인 행동으로 이끌까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죄 많은 아버지가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었다면, 거룩하신 아버지는 어리석고 죄 많은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폭력을 감수하시면서까지 더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사야 63:7-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