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때로 특별한 날이나 기간에 필요한 말씀을 선택하느라 머리를 긁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닙니다. 이사야 64장의 말씀은 확실하게 강림절 첫 주일에 완벽히 부합합니다.
내 말은, 이 장에는 유명한 구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각 구절은 그 자체로 훌륭한 설교 본문이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1절은 열정적인 간구인데,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십니다”란 말씀이며, 4절은 확고한 유대인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고 말합니다. 6절은 총체적 부패를 고백하는데,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은 절망에 가까운 기도로, “오 주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나이까?”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전형적인 강림 기도가 됩니다. 구속에 대한 필요성,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다는 느낌, 하나님이 행하시기를 바라는 갈망,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구속자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다”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됩니다. “오, 당신이 오십니다. 강림하소서. 당신이 강림하십니다. 당신이 오십니다.” “오소서, 오소서 임마누엘이여…” 완벽합니다!
많은 이들이 추수감사절 다음 일요일과 크리스마스 4주 전에 이런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다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휴일이며, 좋은 날이며, “작은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COVID 로 인해 황폐화되고, 인종 분열로 찢겨지고, 미국 대선의 지저분한 경쟁으로 휘어진 한 해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위로와 기쁨, 가족과 선물,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로 가득한 노먼 록웰 크리스마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열망이 이 풍부한 본문을 대림절로의 첫 걸음을 떼기에 완벽한 구절로 만드는 이유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쓰여졌습니다. 캘리포니아 산불, 멕시코만 연안 허리케인,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인종 폭력의 생존자들처럼, 10-11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그들은 삶의 많은 부분을 잃었습니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을 바라보며, “사막이 된 거룩한 도시들, 파괴된 예루살렘, 불에 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봅니다. 11절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오셔서 상황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열망한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해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은 5절 하반절 부터 7절까지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상실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회상할 때 그들의 파멸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범죄함으로 주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쩌다 한 번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뿌리깊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으리이까?” 이스라엘의 부패를 묘사하는데 사용한 이사야의 이미지들은 놀랍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럽혀졌습니다. 여자가 월경 중에 입는 “불결한 넝마”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뼈만 남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오그라진 나뭇잎과 같이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를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림절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자아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자신의 죄를 그들처럼 볼 때까지는 이 대림절 기도를 진정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너무 멀어서 기도도 하지 않는 곳까지 왔습니다. 저는 이 어려운 시국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 심지어 우리 목회자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염려가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으며 주를 붙드는 자도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우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적대감이 먹구름처럼 이스라엘 위에 드리워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 깨달음 없이 과연 우리가 크리스마스의 참된 즐거움을 경험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알기를 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개인으로서, 교회로서, 국가로서 우리의 죄를 고백했다면 지난 한 해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여호와여 심히 노하지 마옵소서. 우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대림절은 우리 죄를 돌아보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 이상인 것에 감사드립니다. 8절에서 “그러나”라는 작은 단어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오 주여,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주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주는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진흙이고 주는 토기장이십니다. 주는 우리를 빚으시고 주께서 원하시는대로 만드십니다. 주께서 방금 그랬듯이, 우리를 무너뜨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는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망가진 냄비나 깨진 컵을 그냥 버리는 완벽주의 예술가도 아니십니다. 주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주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의 손길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역사에 어떻게 관여하셨는지를 기억합니다. “주는 주를 기다리는 자들을 위하여 행하십니다.” 역사와 세계 어디에도 주와 같은 신을 가진 백성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의 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들의 신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44장에서 우상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듯이,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다 무익한 것이거늘….” 여호와는 다르십니다. 주는 권능의 팔과 편 손으로 강림하셔서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행하십니다.
“기다림”이란 단어로 우리는 마침내 대림절 분위기에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즐거운 휴일의 시작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외로운 유배지”에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이 본문이 말하는 죄와 분노에 대해 설교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일단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오시기를 간구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여, 강림하셔서 진동하소서! 1절과 3절에서 진동하는 산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구름과 짙은 연기와 천둥과 번개 가운데 임하셨던 시내산에 대한 암시일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했던 적들인 세상의 나라들을 뒤흔들 하나님의 현현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 전후로 하나님은 열방과 이스라엘이 그 앞에서 떨 정도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름을 걷히시고 주의 능력과 위엄, 주의 정의와 공의, 주의 은혜와 자비로 강림하소서! 물론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특성의 인격화, 하나님 자신의 성육신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강림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는 화해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속죄되었습니다. 우리의 형벌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깨졌습니다.
12절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를 위한 기도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그렇게 기도하고 싶을지라도 말입니다. “오 주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것은 절망적인, 거의 분노에 가까운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휴식을 주지 않으실 겁니까? 조금만 참으시고, 주의 진노를 조금만 누그러뜨려주소서!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의 강림 기도에 응답하실지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기도였습니다.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인내심을 갖고서 대림절을 보낼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우리를 참을성이 없고, 짜증나게 하며, 화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오셨고 다시 오실 것임을 더 절실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따라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십시오, 깊이 회개하십시오,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의 놀라운 일을 회상하십시오, 그리고 열정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오소서, 오소서, 임마누엘이여,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실 때까지 이곳에서 외롭게 유배되어 기다리는 포로된 이스라엘이여. 기뻐하라, 기뻐하라, 이스라엘아, 임마누엘이 네게 임하실 것이다.”
예화 아이디어
COVID로 인해 폐쇄된 기간 동안 나와 아내는 TV를 많이 시청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지만 끈질긴 수사관들이 흉악한 범죄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NCIS와 같은 프로그램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선한 사람이 악인을 꼼짝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깁스와 선원들은 문 밖에 있었고, 악당들은 그 안에서 겁에 질린 무고한 사람을 묶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린 후에 경찰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모든 것을 바로 잡습니다. 이사야 64:1에 나오는 “가르다”는 단어는 “문을 부수다”로 번역될 수가 있습니다. 오 주여,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세력과 사람들에 의해 갇혀 있습니다. “문을 부수고 우리를 구출해주소서!”
이사야 64:1-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