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1-4 주석

성탄 이후 주현절 때에 맞추어 Lectionary의  구약 본문들은 계속해서 세상의 빛인  메시아 주의 종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말씀을 처음 접했던 유다 나라처럼 어두운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 입니다.

이사야가 사역하던 때는 참으로 암흑의 때였습니다. 앗수르가 이미 북 이스라엘 왕국을 침략하였는데 (그 이후 망하게 되어다시 언급 되지 않음) 이것은 이사야 8장에서 언급 합니다 (아래 참조). 머지않아 유다도 앗수르를 정복한 바빌론 제국의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기원전6세기 초에 바빌론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대부분의 유다 백성을 포로로 삼고 귀중한솔로몬의 성전도 파괴하게 됩니다. 기원전 600년대와 500년대에 세계는 어둠과 격동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유다는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휘말렸습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에 적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사야 8:12-14 에서 읽을 수 있듯 국제적 긴장과 공포의 암흑기였던 그 당시에 여러 음모론이 난무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갖가지 음모를 서로 주고 받으며 “영매와 점성가들”의 조언까지 구하면서  어둠이 깊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사 8:18 -22). 다시 말해, 사람들의 절망감이 커짐에 따라 “그들의 하나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산 자를 대신하여 죽은 자에게 묻는” 어둠의 경로를 통한 정보를 좇았던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빛을 구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사야서 8장 20-22절에 묘사된 것처럼 더 깊은 어두움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이것이 우리 본문이 “어둠 가운데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약속하는 배경입니다.

오늘날의 국제적 긴장과 내부 불화가 국민들을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우리 시대와 유사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정말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 날까요? 이에 대한 갖가지 음모 이론이 난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이러한 의심과 공포의 분위기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이사야 8장 12-14절을 들어야 합니다.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슬프게도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이 아닌 다른 곳에서 길잡이를 찾습니다. 이러한 현재어둠가운데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사랑의 단어, 저항의 단어, 바로 복음을 간단히 요약한 “그러나 하나님께서…” 라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여기 세상에는 어둠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다른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 중에 있던자들에게는 더 이상 흑암이 없을 것이다.” 그런 다음 북 왕국의 최북단 지역, 앗수르의 첫 번째 공격을 받은 영토, 즉 그리하여이스라엘의 첫 번째로 이교도의 흑암에 굴복한 영토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운명의 역전을 약속하십니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다시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들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을 가리키십니다.)

전 세계 여러 곳의 주현절 예배에서 읽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또는 이 본문과 시편 23:4의 새로운 번역에는 ‘가장 캄캄한 그늘의 땅’이라는 표현을). 마태복음이 이예언을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심으로 연결한 이래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본문을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마태복음 4:12-16).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시니…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사야는 이 빛의 도래를 기정사실로 말하지만, 물론 그 이후 수세기에 걸친 암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빛이 이 세상에비친 후에도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믿음과 기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이스라엘과 유다를 포로 상태에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나라를 크게” 하셨고  그의 아들을 온 세상의 구주로 보내심으로써모든 나라와 족속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왕국을 확장하셨습니다. 주현절 이후 세 번째 주일에 우리는 기쁨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즉 풍성한 추수가 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21세기 도시 문화에서 우리는 식량 불안정이 있는 나라의 사람들처럼 땅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그 기쁨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전쟁이 끝난 후 “약탈물을 나누는 것”의기쁨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2차 세계 대전이든, 긴 스포츠 시즌의 끝이든, 오랫동안의 암 치료 후이든, 길고 힘든전투 후 승리를 축하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어둠 속에 “빛이 비취었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기억하는이 주현절 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기쁨입니다.

성도들이 빛의 도래함의 기쁨을 경험하도록 돕기 위해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기쁨의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될 것입니다. 우리는 4-6절에서 그 이유를 발견합니다. 각 절에서 한가지 씩 이유를 나열합니다: 하나님께서 압제가운데서 건져주셨고, 하나님께서  전쟁의 무기를 소멸하셨고,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통해 모든 이들이 고대하는 평화를 주셨음이다.

이러한 이유를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제거하신 “짐을 메는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에 대해 기록할 때 그는 분명히 바벨론의 정복과 포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일부에게는 삶에부담이 되는 억압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영혼을 짓누르는 것은 죄의 영적 멍에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은 죄의 속박을 끊으셨고 사회적으로도 사람들을 묶고 있는 사슬을 끊고 계십니다. 우리는 새로 찾은 자유를 아직 완전히 누리지 못하더라도 기뻐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군화와 군복을 불사르는 일에 대해 쓸 때 그는 모든 전쟁이 그칠 것을 의미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뿐 아니라 (이사야 2장), 군복과 군화까지 불에 태워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사망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거나, 땅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PTSD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그러나 어떻게 이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탄생과 삶,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가득 찬 오늘 본문의 예언은 가장 큰 기쁨으로 끝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의 어깨에 메어지는 것이아닙니다. 가장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조차 세상이 갈망하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능가하는 신적 통치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이 “아들”에게 주어진 네 가지 유명한 이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여기서  각 이름의 무한히 깊은 의미를 설명할 시도는 안하겠습니다. 단지 사람들에게 그 이름들이 우리의 현재 정치적 현실들을 어떻게 뛰어넘는지를 선포합시다. 이러한 통치자 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기때문입니다.

사실, 정치인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국가가 흥망성쇠하고, 정부가 형성되고 해체되고, 세계 국가들 사이와 국가 내부에서항상 소동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이 통치자 조차도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그의 통치를 묘사하는 방식을들어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그는 견디어 낼 뿐 아니라 계속해서 흥할 것입니다. 그의 통치 하에서 상황은 점점 더 좋아질 것입니다.

다윗처럼 (실제로 다윗의 약속된 영원한 보좌에 앉은 분) 그분은 정의와 공의의 평화를 확립하실 것입니다. 많은 전쟁들이 이전 전쟁을 종식시키는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부당한 평화에 대한 반발로 인해 발생합니다. 계속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나라들 사이에 정의가 없고 민족들 사이에 공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이름들을 가진 이 아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과 정의로 대우받을 것이기 때문에 무궁한 평화를 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 되겠지만, “만군의 여호와의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이 “아기”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임한 빛의 실상으로 인해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태어나 우리를위해 죽으시고 지금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려 다시 오실 그 “아기” 가 다스리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음모론이 난무하는 긴장되고 두려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묘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전 한가족이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된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한 시간 후 나는 한 트럼프 팬이 “엘리자베스 워렌이 당선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말한 뉴스 보도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진술을 고려할 때, 진영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선출되면 할 것인지에 대한 갖가지 억측과  음모론을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로 인한 두려움이 도처에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주현절Epiphany이 우리를 감동시켜야 하는 기쁨을 설명하기 위해  교회당 안 화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 사진 이나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기뻐하는 사람들, 또는 한 스포츠 팀이  우승후 열광하는 관중들, 임신 발표에 기뻐하는 부모와조부모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