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축하 기간이 끝나고 일상적인 시기가 시작됨에 따라 Lectionary는 이러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을 위해 한 주일을 택합니다.
복음서와 서신서의 본문들은 분명하게 삼위일체적입니다. 첫 번째 본문은 세례와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고, 두 번째 본문은 중요한 서신 중 하나의 결론으로 삼위일체를 사용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의 시작과 끝에서, 축복을 시작하는 삶의 일부로, 그리고 축도로 마무리하는 삶의 일부로 명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주일의 본문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을 사용하기로 선택했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청중에게 제공하는 것은 축복이나 축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과학주의 신념과 씨름하는 우리의 많은 청중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라고 말한 점에 유의하십시오. 전자는 경험적 사실을 다루는 방법이고 후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일련의 믿음을 말합니다. 과학은 기독교 신앙에 도전하지 않는 반면, 과학주의는 많은 기독교인의 믿음을 잠식하고 비기독교인이 기독교 신앙을 고려하는 것조차 막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기쁜 소식을 설교하는 일은 교회를 진정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명시적으로 가르쳐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희미하게나마 삼위일체에 대한 힌트가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창조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영은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셨고, 하나님은 말씀을 말씀하심으로써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골로새서 1장, 히브리서 1장과 같은 본문에 비추어 읽어 볼 때, 창세기 본문 안에는 창조의 하나님이신 그 분 안에 삼위가 있다는 최소한의 힌트가 충분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대한 믿음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핵심 질문, 즉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으며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 저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대해 설교할 때 이 논쟁적인 구절을 설명하기 위한 목회적 방법으로 오래된 개혁주의 신앙고백 중 하나를 사용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삼위일체로 시작하는 사도신경을 다루기 때문에 매우 개인적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 분은 무로부터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자신의 영원한 경륜과 섭리로 그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이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하나님이십니다.”
요리문답은 우리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과학적 논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요리문답이 수세기 전에 쓰였을 때는 그러한 논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리문답의 강조점은 오늘날 이 논쟁을 다룰 때에 도움이 되는 매우 똑똑하고 성경적인 방법을 제공해줍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신성한 창조의 기적을 언급하면서 관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은 전체 창조 이야기가 실제로 구속 이야기에 관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요리문답을 지침으로 삼아 창세기 1장과 2장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우리 모두가 개인적으로 씨름하는 세 가지 질문, 즉 ‘누가’, ‘왜’,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의 첫 번째 장과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우선 ‘어떻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주 언급되는지 세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부르셨고,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요점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당신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당신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믿어 온 우리에게는 그리 중요한 말로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G. K. 체스터톤(G.K. Chesterton)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유쾌하게 변호했습니다. “모든 범신론, 진화론, 현대 우주 종교의 본질은 자연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명제에 있다. 기독교의 요점은 이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다. 자연은 우리의 자매이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이 말하는 바입니다. 지구는 우리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지구는 우리의 자매입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우리 둘 다 같은 아버지, 예수님 때문에 내 아버지에게서 왔습니다. 그것이 주로 창세기 1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가 아니라 누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왜’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제 두 가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이 끓는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열을 가하면 물 분자가 빠르게 진동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이 끓는 이유입니다. 또는 누군가가 차 한 잔을 원하기 때문에 끓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끓는 이유입니다. 첫 번째는 물리적 과정을 말하고 두 번째는 개인적인 목적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왜 세상이 두 번째 의미, 즉 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26-27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인류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듯이 하나님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과 닮은 피조물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과 우리를 창조하셨습니까? 왜 우리는 여기 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고 다시 그 사랑을 받기 위한 순전한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면서 요한복음 3:16은 구속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 동일한 사랑이 창조를 설명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피조물과의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그가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창세기 1장이 시사하는 바는 창세기 2장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이며 다른 이야기이자 앞선 이야기와 모순된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글 지도가 생기기 전 과거에 크로스컨트리 여행을 위해 트렁크에 넣어 두었던 랜드 맥날리 아틀라스(Rand McNally Atlas)와 같습니다. 그 아틀라스에는 미국 전체의 지도와 모든 주요 주간 고속도로를 보여주는 모든 주의 지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도시의 세부 사항을 보여줄 지도인 삽입된 지도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2장에 있는 삽입된 지도이며, 창세기 1장에 대략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하나님의 인류 창조에 대한 세부 사항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이 4절에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백성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백성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이교도의 어둠 속에 있던 그들을 선택하시는 일부터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일까지,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하시는 일까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복적인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도록 독생자를 보내시는 일까지 어떤 일도 하십니다. 이 창조의 하나님은 인류와의 관계 이상도 이하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가 이 모든 것과 우리 모두를 창조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시편 33:1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것이 창세기 1장이 말씀하는 강조점입니다. ‘누가’ 그리고 ‘왜’ 하셨는지 말입니다.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성경은 단순히 “그가 말씀했다”라고 말합니다.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라고 말합니다. 시편 33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진화론에 반대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이 구절은 체스터톤이 “진화주의”라고 부른 것에 반대하는 주장입니다. 그는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닌,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유사 종교 철학으로서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창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과학에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에 반대합니다.
창세기 1장은 세상에 있는 다른 종교들의 설명에 대항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즉 그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이 구원 받은 이집트의 종교, 한 동안 이스라엘이 그 손아귀에 빠져 있던 바벨론의 종교, 고대에 그 문화가 전 세계에 스며들었던 그리스의 종교를 반박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한 종교 중 일부는 많은 신들의 싸움으로부터 세상이 나왔다거나, 성관계를 통해서 혹은 신들의 노력으로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른 이들은 만물이 나온 우주에는 두 개의 동등한 힘이 있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이들은 모든 것이 항상 존재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창조에 관한 진리를 계시하셨습니다. “태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다툼이나 투쟁을 통해서도 아니고, 성관계를 통해서도 아니며 다른 존재와의 협력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단순히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말씀뿐이었고, 그러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 진술, 깊은 종교적 진술입니다. 참으로 신약은 그것이 복음의 일부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진술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장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히브리서 1장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인 아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까? 가이사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육신이 되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을 통해서 입니다. 성경 전체에 비추어 읽을 때 창세기 1장과 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구속을 위해 아기 예수가 되시기 훨씬 전 창조의 시기에 이미 활동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문적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입니다. 첫째, 그것은 성경적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의 발견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과학은 순전히 인간의 활동이므로 인간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오류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실, 한 시대에는 확실했던 과학적 발견의 많은 부분들이 다음 시대에는 인정사정 없이 버려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 이론이 아무리 널리 받아들여진다 해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이나 과학의 방법으로 논쟁할 이유는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도전하는 모든 신앙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과학의 사실로 논쟁할 필요가 없지만, 사실을 넘어 사실에 대한 종교적 설명을 제공하는 일부 과학자의 믿음으로 논쟁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서 1장과 함께 완벽하게 기꺼이 말할 것입니다. 고전 11:3, “믿음으로 우리는 우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어진 줄을 압니다.” 비기독교 과학자들도 똑같이 정직해야 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물리적 현실이 존재하는 전부라는 것을 이해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학전 사실을 가지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일부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논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연구에서 끌어낼 수 있는 두 번째 결론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의 성차별적인 노래가 제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한 남자가 노래를 부릅니다. “이름이 뭐야, 아빠가 누구니? 그는 나처럼 부자인가? 그가 당신에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줄 시간이 있었나?” 그것은 어머니 지구에 대한 가장 독실한 신자의 마음을 괴롭히는 질문입니다. “너의 아빠는 누구니?” 기독교 신앙은 “하늘과 땅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 곧 아버지시니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창조/진화 논쟁이 그토록 개인적인 일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당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가’, ‘왜’, ‘어떻게’를 찾기 위해 세상을 외롭게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혼자가 아니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적대적이거나 비인격적인 힘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과학을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과학의 이름으로 당신은 하나님을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의 아버지를 만나십시오.
예화 아이디어
몇 년 전에 끈 이론에 관한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의 블록버스터 책, 『엘러건트 유니버스』(The Elegant Universe)를 읽었습니다. 나는 이 책이 매력적인 동시에 믿음에 도전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2020년 3월 2~9일 타임지에서 그린을 인터뷰한 제프리 클루거(Jeffery Kluger)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만약 당신이 우주에 대해 꿈꾸고 있다면, 여기에 프로 팁이 있습니다: 브라이언 그린에게 말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우주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빠르게 식혀 버릴 것 입니다. 나는 최근에 행복하고 즉흥적인 질문들을 잔뜩 갖고 [Greene]의 사무실을 잠시 들렀다가, 별 소득 없이 그곳을 떠났습니다. 자연적인 도덕 질서와 같은 것이 존재합니까? 저는 궁금했습니다. 이 우주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대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천억 개의 은하와 수조 개의 행성이 있는 138억 년 된 우주 전체가 처음에 발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니요, 그린은 그런 목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괜찮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린은 자유 의지의 존재를 인정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당신의 입자들은 단지 그들의 양자 역학 행진 명령에 복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차갑고 잔인하고 기계적인 우주는 학생들을 우울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울면서 오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은 내 세상을 뒤흔드는 것 같다’고 말했고 나는 그들에게 ‘그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조각들은 결국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느낀 것은,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물리학자가 세상을 접근하는 방식은 옳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 위대한 신비는 시간이 지나면 증발할 것입니다.” “내 느낌”이라는 표현과 “나의 믿음”라는 표현에 유의하세요.
창세기 1:1-2:4a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