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영광을 드러내셨던 그 장엄한 순간인 세례를 축하하는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 렉셔너리의 본문들은 모두 물과 관련 있습니다. 곧 창세기 1장의 태초의 물, 시편 29편의 뇌우를 일으키는 지중해의 물, 사도행전 19장의 세례의 물,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물이 그 본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마가복음 1장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이번 주일 주제인 예수님의 세례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가복음 1장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창세기 1:1-5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예수님 세례의 지축을 흔드는 중요성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1장은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마가복음 1장은 창세기 1장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만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의 장엄함과 신비와 기적을 감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사람들은 마가복음 1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훨씬 더 깊은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많은 학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을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항상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가정합니다. 어떤 것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존재하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천지”는 우주 전체를 의미합니다. 우주가 항상 이렇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본 모든 사람은 아무것도 없거나 아무도 없었던 시기는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믿습니다. 질량이든, 에너지든, 사람이든, 영원한 어떤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영원한 그 ‘어떤 것’이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 아니 실제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정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우주에서 우리의 특별한 행성인 지구를 창조하려고 하실 때, 땅이 “형체가 없고 공허”했으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형태가 없고 공허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모습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볼 수 있는 빛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는 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심상치 않은 세 단어, 즉 ‘토후 와보후’와 ‘테홈’(tohu wabohu, tehom; 형체 없음과 공허함과 깊음)을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어 개론 수업에서 이 단어들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신비함과 두려움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원시 세계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지만, ‘토후 와보후’가 다시 돌아와 우리가 또 다시 ‘테홈’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 글 마지막 부분에 있는 제 예화 아이디어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분리하고 모아서(첫째 날-셋째 날) 세상에 형태를 가져오고, 만들고 채우면서(넷째 날-여섯째 날) 공허함을 제거하셨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대해 듣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암호와 같은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기본적으로 “숨 또는 바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단순히 원시 세계의 물이 바람에 의해 휘저어졌다는 것, 즉 폭풍과 혼돈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성령의 존재에 대한 초기 힌트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그 문장의 “그리고”가 실제로 “그러나”인지 궁금해하기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둡고 깊었지만, 말씀과 함께 형태와 질서, 충만함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계셨고,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읽기 원합니다.
그러나 2절 마지막에 나오는 이 구절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 사역이 상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빛을 던지셨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당연합니다. 빛이 있기 전에는 가시성과 생존성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빛 없이는 볼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이 존재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하늘의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라”는 말씀을 들어 우리가 보는 빛이 넷째 날까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 광명체들로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심오합니다. 신약성경에 계시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해나 달이 없이 직접 빛을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23 말씀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원래의 하늘과 땅과 같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창세기 1:3이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광명체들이 없이 어떻게 빛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구절 (그리고 같은 공식을 사용하는 다음 구절)의 요점은 “하나님이 이르시되”입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다른 모든 고대 설명들과 달리, 창세기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싸우거나 음행하거나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됩니다. 이것은 반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심오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이것은 진화라고 부르는 과정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인 하나님의 창조력에 대한 단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존재로 부르셨을 때나 자신의 빛을 세상에 비추셨을 때, 또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에 들어오셔서 모든 인간을 비추는 빛을 가져 오셨을 때, 하나님은 그 빛이 선하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지속적으로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세상이 악하지 않고 선하며 완벽하고 흠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방법으로 6번이나 더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창조하려 하지만, 종종 실패합니다. 우리의 창조적 노력에 결함이 있거나, 제품이 잘못 되거나, 금이 가거나, 변색되거나, 완전히 부서지는 일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더 이상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완전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을 때.. 제가 너무 앞서 가는 것 같습니다.
창조 첫날은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에게 이름을 주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는 힘과 주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음 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능력, 곧 명명하게 하신 능력은 소유권 또는 지배권을 나타냅니다. 당신이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부를 수 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의미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사랑으로 혼돈과 어둠에 모양과 내용을 부여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기를 낳을 때처럼 사랑의 표시로 이름을 지어 주십니다. 그렇게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시간 구분인 낮과 밤이 하나님의 선물로 시작되었습니다. 해가 뜨고 뜨는 일은 없었지만, 본문은 그날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첫날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1-5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말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며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창세기 1장과 마가복음 1장을 연결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장은 예수님의 세례의 우주적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천지창조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을 조성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과 영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말씀과 영으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요단강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예수님은 창조의 물로 우리가 아는 세상이 되게 한 바로 그 말씀입니다(요한복음 1장). 예수님께서 팔레스타인의 진흙탕 물에 들어 가시자, ‘토후 와보후’의 세력이 길들여지고 ‘테홈’을 덮고 있던 어둠이 밀려났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면 마가복음 1장은 새로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요한계시록 21:5)
예화 아이디어
여러분이 설교 중에 사운드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면, “빛이 있으라”는 구절이 나올 때 Richard Strauss의 “Also Sprach Zerathustra”를 사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Google에서 이 곡을 검색하면 (제 생각에) “2001: A Space Odyssey”에 나오는 멋진 동영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트럼펫과 팀파니, 그리고 전체 오케스트라의 조합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입니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될 만합니다. 물론 이 곡의 제목에 다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목은 밝히지 말아야 할 모릅니다.
사람들이 ‘토후 와보후’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2020년 9월 말에 있었던 첫 번째 미국 대통령 토론회의 혼란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어느 정당에 속해 있든 토론회는 형체도 없이 공허하고 어둠이 짙게 깔린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후보자들이 터무니 없는 것들을 주장하고, 서로를 공격하고, 운동장에서 격분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처럼 충돌하는 모습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파도가 부딪히는 모습 같았습니다.
창세기 1:1-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