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8:10-19a 주석

개정 표준 성구집이 창세기 28장의 이 이야기를 마지막 세 구절 직전에서 끊어버린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비록 그 구절들이 이 이야기의 결정적인 반전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창세기 중반부의 주역인 이 말썽꾸러기 야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널리 알려진 주일학교식 이야기 버전에서는, 야곱이 ‘하늘로 닿는 사다리’ 꿈을 꾼 뒤 보인 반응이 오로지 경건하고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처럼 묘사되곤 합니다. 그는 베개 삼아 베었던 돌을 일종의 제단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어 그곳을 거룩히 구별한 뒤, 그 장소에 새로운 이름을 선포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히브리어로 ‘벧엘’입니다.

하지만 특정 TV 광고에서 흔히 말하듯, “잠깐만요! 아직 더 있습니다!” 야곱이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잠시나마 ‘하나님의 집’을 뒤로하고 떠날 채비를 하는 순간, 그는 충실한 하나님의 종 역할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거래’를 제안하기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제 제안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야곱이 기도합니다. “만약 저를 위해 나서 주시고, 저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며, 언젠가 제가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그때 제가 하나님을 저의 하나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거래하시겠습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관계나 충성심은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주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가로챈 사건을 다룬 설교 해설에서 언급했듯이, 야곱은 평생 단 한 번도 계획 없이 일을 도모한 적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항상 틈을 노리고, 음모를 꾸미며,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는 이미 한 차례 형을 속여 넘겼고, 뒤이어 또 다른 계략을 꾸며 이번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노령의 아버지와 다소 우둔한 형 에서를 동시에 속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임수의 여파로 도망치듯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훗날 외삼촌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떠날 때쯤이면 그 집안 재산의 대부분이 야곱의 손에 넘어가 있게 됩니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한 육군 장군은 미군 라디오 방송국(AFRN)의 최고 인기 진행자 에이드리언 크로나워(로빈 윌리엄스가 코믹하게 연기한 인물)가 리처드 닉슨 전 부통령의 기자회견 녹취록을 짜집기해 그를 바보로 만든 사건의 여파를 수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크로나워의 직속상관은 닉슨이 그토록 고결하고 품위 있는 사람인데 이런 짓을 한다니 정말 끔찍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장군은 눈썹을 치켜뜨며 “꿈 깨게! 난 닉슨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데, 그 인간이 싸질러 놓은 똥이 얼마나 많은지 기차 한가득 실어다가 시나이반도 전체를 비옥하게 만들고도 남을 걸세!”라고 응수합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인간관계와 가족의 파탄이 뒤따랐고, 기만과 교활한 술수가 난무했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환상적인 꿈, 곧 야곱과 그의 후손들의 미래를 향한 놀랍고도 풍성한 약속이 가득한 꿈을 마주하고도,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려 들며 거래를 시도합니다. 야곱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실 때에만, 비로소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식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일단 지켜보겠다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어떤 인간인지 이미 속속들이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교활함과 간교함,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남들보다 앞서고, 어떻게든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사기를 일삼는 그의 기질을 훤히 꿰뚫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이 꿈속에 담긴 약속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더 주실 수 있는 게 있었다면, 아마 하늘의 달과 별까지 덤으로 주시는 것뿐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오늘날 이 본문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선언을 합니다. 곧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신 줄 전혀 몰랐다는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이 우연히 하나님의 집을 발견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편재성을 믿으며, 우리가 어느 곳에서 기도를 드리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야곱의 무지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택받은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의 기록이기에, 당시 그들의 신학이 아직 온전히 정립되거나 체계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야곱이 살던 시대는 특정한 신들이 특정 장소에 국한되어 존재한다고 믿던 때였으며, 또한 세상의 어느 특정한 장소들은 신들이 거주하는 차원과 인간이 서 있는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가 유독 얇고 투명해서, 그 틈새로 신의 임재를 마주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발견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어디로 가든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진리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 같은 사기꾼이라 할지라도, 그의 흠 많고 불완전한 성품에 개의치 않고 기꺼이 그와 함께하고자 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변화시키겠다는 분명한 성장 목표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막을 내릴 때쯤, 우리는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훗날 그가 하나님께 친히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우리가 흔히 ‘야곱의 사다리’라 부르는 이 꿈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이 대개 그렇듯, 이 역시 시간이 흐르면 ​​점차 배경 속으로 묻혀 이후 본문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쉽게 지나치기 쉽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인 예외가 딱 하나 존재합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결국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던 야곱의 꿈을 분명하게 언급하십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나다나엘을 보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거짓이나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한 주석가가 말했듯이,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시는 말씀의 핵심과 요지를 이렇게 표현하여 옮겨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보라, 그 안에 ‘야곱’이 전혀 섞이지 않은 이스라엘이 여기 있구나.” 나다나엘이 조금 전 빌립에게 나사렛 같은 시골 촌구석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코웃음을 쳤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칭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서 정직함을,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을, 그리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기꺼이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하셨던 것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28장에 대한 이 언급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인상적이지만, 이것이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신호는, 예수님이야말로 일찍이 벧엘에서 야곱에게 그 모든 약속을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성육신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약속이 곧 나사렛이라는, 그야말로 뜻밖의 곳에서 온 이 사람을 통해 완전한 “예”가 되리라는 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제 걸어 다니는 ‘벧엘’이자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집’이 되신 것입니다. 일찍이 요한이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선포했듯이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집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실 때, 우리 역시 그분의 은혜로 나다나엘처럼 저마다 작은 벧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