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본문을 아주 다른 두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관점은 저명한 구약학자인 Walter Brueggemann이 주장한 것으로, 이 이야기의 최종 형태를 솔로몬의 통치 기간 중에, 곧 이스라엘 왕가가 번영을 누렸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시기에 최종 편집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는 평화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적어도 솔로몬에게는) 번영이 주어졌고, 지적인 면에서는 (지혜 문학의 번성에 따른)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습니다. Brueggemann은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통제가 확립되고 충분해 보이는 이런 사회적 상황과 관련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지난 5개월 전까지의 21세기 북미의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관점은 인간의 통제가 완전히 상실된 것처럼 보였던 2020년 2월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계적인 보건 위기가 닥쳤고, 그 위기는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그 이후, 이런 혼란에 더하여, 여러 곳에서 흑인에 대한 경찰의 잔학 행위에 대해 모든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폭동이 일어난 곳도 많았습니다. 사회의 구조 자체가 누더기 조각처럼 찢어져 버릴 수 있는 위기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이 혼돈과 고통 속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었습니다. 2020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이 본문을 향해 Brueggemann이 던진 것과 정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통제가 확립되지 않고 전적으로 불충분해 보이는 이런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창세기 37장-50장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는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혼돈에서 통제로, 갈등에서 화해로, 패배에서 승리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요셉을 통해 이 이야기와 우리 역사를 관통하는 깊은 신학이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은 명백하게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숨겨진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큰 맥락으로 이 이야기를 보아야 합니다. 이 긴 이야기는 창세기의 열 번째이면서 마지막 부분에 속해 있습니다.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에 대한 원초적인 이야기 이후, 우리는 많은 이들의 아버지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이교도 아브람과 택함 받은 자가 될 기적의 아기 이삭과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될 12아들들과 더불어 축복하실 사악한 야곱에 이르는 초기 족장들의 역사를 따라왔습니다. 이 이야기에 앞선 몇 장에서, 라헬이 죽었고, 12명의 아들들이 확인되었으며,
에서의 가계가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그 광활한 무용담의 완전히 새로운 장이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가족 간의 기능 장애에 대한 도덕적 이야기가 아니라, 가나안에 있던 야곱 가족이 어떻게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 축복받은 가정이 세상을 축복할 축복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어떻게 약속의 땅에서 속박의 땅으로 옮겨갔는지, 또 그 반대로 그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을 향해 출애굽한 것과 그 땅을 정복했는지에 관련된 더 큰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흥미로운 인물과 그들에 얽힌 상호 작용의 매혹적인 세부 사항에서 길을 잃지 말고,
그의 백성과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숨겨진 행동들과 관련된 거대 담론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모든 초점은 요셉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저자는 분명히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실제로 야곱의 집, 곧 현재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사람의 언약적 혈통과 이스라엘 나라가 될 민족에 관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그러한 발전 과정에 있어 핵심 인물입니다.
요셉은 (그의 남동생 베냐민이 태어날 때까지) 무리의 마지막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아이였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기일 때부터 그는 아버지 야곱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야곱은 자신의 편애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요셉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만하게 뛰어다녔고, 형들을 괴롭히는 쪽을 택했으며, 형들과 아버지에게 자신이 우월하게 되는 꿈 이야기를 거만하게 떠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의 특권적인 지위와 오만한 태도와 적대적인 행동을 질투하여 그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는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버릇 없는 녀석이었습니다.
RCL이 요셉의 자세한 꿈 이야기를 생략한 것은, 그의 꿈이 이 오프닝 스토리와 더 큰 스토리 안에서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설명하기 어렵고 불행한 일입니다. Brueggemann은 이 두 꿈 이야기에 포함된 “그 꿈”이 요셉의 전체 무용담을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꿈이 없었다면, 그의 형제들이 그를 지나가는 상인에게 팔기 직전에 그를 “꿈꾸는 자”라고 불렀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이 궁극적으로 우월하게 되는 꿈/예언이 전체 이야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위해 그의 꿈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 꿈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그들의 아버지에게 악몽이 되었습니다. “그 꿈꾸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 찬 그의 형제들은 요셉이 그가 보호받을 수 있는 영향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들을 방문하도록 한 야곱의 우둔한 명령을 이용합니다. 형제들은 집에서 60마일-70마일 떨어진 곳에서 양 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그들의 살인적인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 목에 가시 같은 존재인 그를 없앨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들의 음모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의 폭력 장면들이 그렇듯 혼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살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투옥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상인 무리에게 그를 파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형들이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개입하려 했지만, 결국 그는 사라졌습니다. 그때 누군가 요셉의 부재를 아버지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사자나 호랑이 또는 곰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내며 (맙소사!), 염소의 피에 적신 요셉의 채색옷으로 그의 죽음을 증명합니다. 그때 야곱의 악몽이 시작됩니다. 그가 염려한 대로, 그 악몽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은 요셉을 잃은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정도의 죄책감과 슬픔과 절망으로 고통을 겪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주목할 만한 하나의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은 아니지만, 창세기 37장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독자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요셉에게 아직 끝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의 꿈이 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하나님은 분명히 부재하십니다. 그리고 활동하지 않으십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꿈은 우리의 잠재 의식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꿈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세계에서 꿈은 종종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위한 하나님의 꿈을 주십니다. 요셉을 위한 꿈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방법이 작동하고 있다.”고 암시하십니다. Brueggemann은 계속해서 “역사의 우연성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은밀하고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길은 신뢰할 수 있으며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요셉과 그의 가족, 솔로몬과 그의 가족, 그리고 이 혼돈과 고통의 시기에 인류 가족에게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
인종적인 면에서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Martin Luther King 박사의 불멸의 말이 계속해서 마음을 고양시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는 이 말을 l960년 대에 선언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인종 간의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실현될 수 있는 꿈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실현은 이스라엘의 또 다른 자손,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기 위해 고난을 받고 죽음을 택하신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에베소서 1 장). 인류를 위한 그 꿈의 궁극적인 성취는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집니다(요한계시록 7장).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이 장로들 중 한 사람에게 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물었을 때, 그는 (창세기 37장을 되풀이 되는 것과 같은)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는 말 듣습니다. 이것이 갈등과 죄 가운데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창세기 37:1-4, 12-2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