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7:1-7 주석

사순절 구약 본문에 대한 마지막 두 번의 설교 주석(창세기 2:5~17, 3:1~7과 창세기 12:1~4a)에서 나는 렉셔너리가 구원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One for All”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우리 모두를 위해 단 번에 죽으신 그 분 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 주제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중재자 중 하나인 모세의 사역과 관련된 에피소드로 여기 출애굽기 17장에에서 계속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구절을 숙고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렉셔너리가 왜 이 작은 이야기를, 모세의 생애에서 보다 더 중대한 사건들, 즉 그가 바로와 대결한 것, 홍해를 가른 것, 시내 산에서 보낸 시간,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 기도와 같은 것들이 아닌, 왜 이 작은 이야기를 선택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많은 고민 후, 나는 RCL이 본문의 물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생수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과 연결되는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종종 RCL이 내린 선택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번 주간의 본문 조합은 과연 천재적입니다. 출애굽기/요한복음 본문들이 분명한 모형/원형(type/anti-type) 관계라는 사실 말고도, 시편 95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불평하고 시험한 장소 이름들을 그들이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권고의 외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은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과 시험이란 두 주제(물에 의한 시험?)가 이번 사순절 셋째 주일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야기에서 물이란 소재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유월절과 출애굽 이후, 그들은 홍해, 나중에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라진, 그 물에 갇히게 됩니다. 광야 생활 초기에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15:22 이하에 보면, 물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을 시작합니다. 그 필요가 충족된 후,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또 다른 그들의 투덜거리는 반란을 진압하십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부족한 물 때문에 모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또 다른 다툼이 시작됩니다. 나중에 그들이 정복해야 할 약속의 땅이 열리는 요단강이 그 절정을 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딜레마에 공감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의 불평을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제 말은 물이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충격적인 진술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온 회중”은 수천 명, 수십만 명의 남녀와 어린아이와  가축입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곳엔 물이 없습니다. 따라서 풀도 없고, 음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계속 일어나 이동합니다. 잘 했습니다. 여러분!

하지만 그들이 낡아지고, 건조해지고, 매우 건조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이라면, 자신을 위해 우십시오. 어머니라면, 자녀를 위해 우십시오. 아버지라면, 가족과 가축 떼를 위해 우십시오. 인간은 물 없이 100시간 밖에 살 수 없습니다. 특히 하루 종일 걷고 있을 때, 극한 더위 속에서는 그 정도 조차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목마르고, 짜증나고, 다투기 좋아했던 것,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이 나라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물과 더불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불평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출애굽기 3:7 이하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던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종종 극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의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그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속과 공급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왜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물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원망하고 불평하고 다투는 것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았고,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때였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오~ 하나님, 최근에 저를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이것은 이 이야기와  우리 자신의 삶에 스며들고 있는 커다란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에 대한 시험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사건,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시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어 모든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전에 에덴에서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백성이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하셨습니다.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되, 하나는 먹지 말아라” “네 본토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곳으로 가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출애굽기 15:25~27)

이스라엘은 종종(그리고 그들의 영적 상속자인 우리도), 상황을 뒤집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순종이 힘들어지고 우리가 고통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종종 고통에 집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채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들의 첫 번째 불평에 “이유”에 반응할 때, 그 이야기는 간단하게 “그러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목말랐고 그래서 그들이 불평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즉각적인 (그리고 합법적인) 필요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항상 그 약속을 지키셨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압도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그들의 즉각적인 만족이란 시험을 통과하셔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시고, 기적을 보여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믿고, 순종하고, 불평을 멈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술을 행하고, 시험을 통과한다면, 우리가 믿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의 의지에 굴복한다면, 우리가 당신의 뜻에 순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분석인데, 이 이야기와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누구의 의지가 이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고 축복하기 원하셨으며, 단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헛된 희망으로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 대항하는 데 그들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리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와 그 정점에 있는 피조물들을 더럽히고 파멸시킨 의지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이 이야기와 복음서의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의 고집스럽고 반항적인 자녀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들을 처벌하는 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물을 주십니다. 논쟁과 시험에 대한 너무 친숙한 이 이야기는 은혜의 복음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마실 물과 같이 단순하지만 본질적인 선물의 형태인 은혜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복음서 본문인 요한복음 4 :5~42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계시고 시원하고 맑은 물을 갈망하신다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했을 때, 이 사건에 이어지는 이후 대화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생수가 되실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녀는 집으로 달려가 모두에게 메시아가 바로 저기 우물 옆에 앉아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갔다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배가 고프신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를 지배해 온 의지와의 싸움과 직접 관계되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4) 이스라엘과 교회가 시련의 압박 아래 실패했던 그것을 예수님은 죽기까지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다른 동산에 앉아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다른 결과로 재연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목마름의 고통을 경험하신 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셨고,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

시련의 시기에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마술이 아닌 순종과 신뢰의 시험을 죽기까기 통과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셨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서 8:31~32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순절 주간을 위한 추가 자료를 이용하실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아이디어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거대한 의지와의 싸움은 수십억 개의 단순한 인간 시나리오로 펼쳐집니다. 3살 먹은 어린 아이가 가족 식사 이후 고집스럽게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끈적끈적한 리마 콩(lima beans)을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3살 소년이 화면 시간 제한에 대해 화를 내고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성에 대한 또 다른 논쟁 후 침묵 가운데 열을 내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집에 오기를 거부하는 평생 탕자도 있습니다; 가수 Rat Pack은 도전적으로 “내 방식대로 했어요”라고 신음했습니다; 물론, 경쟁하는 인간의 의지와 더불어,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평화와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하나님이 변함 없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넌지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만큼 행복해 지지 않도록 막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