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1-4, 7-9, 12-20 주석

한 번에 설교하기에는 너무 많네요! 저는 이 구절들을 열 번으로 나누어 설교해 왔습니다. 잇따른 계명들의 각 단어들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말입니다. RCL이 두 번째와 네 번째 계명과 관련된 중대한 신학적 문제를 생략함으로써 우리를 도우려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 구절들이 너무나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마음입니다.

오랜 초등학교 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코끼리를 어떻게 먹나요?  한 번에 한 입 씩이요.” 나는 이 본문을 세 단락으로 나누기를 제안합니다: 뒤따르는 내용들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조하는 1절-2절;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3절-17절; 현대 사회에서 이 말씀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소개하는 18절-20절, 이렇게 세 단락입니다.

현대의 모든 학자들은 이 구절들이 고대 근동의 언약 형식, 곧 주인이 자신의 백성과 맺는 계약 조건들의 개요를 설명하는 형식을 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강조는 이스라엘이 단순히 주변 국가들로부터 이 모든 것을 빌려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 한 도움이 될 만한 통찰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기 위해 익히 알려진 형식을 사용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두 구절에서 이 말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도덕에 있어서 거의 보편적 상대주의를 견지하는 시대와 이스라엘의 일신교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했다는 사실을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시대에, 설교자가 1절-2절이 말하는 내용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말씀은 모세의 말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주장은 우리의 다신교적 또는 무신론적인 세계에서 너무나 놀랍고도 공격적인 말입니다. 본문은 이 말씀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부터 특정한 민족에게 주어졌으며, 이 말씀을 세상에 전달하고 소통하는 사람으로 삼기 위해 그들을 선택하셨다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C. S. Lewis는 매우 풍자적이면서도 공격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이 말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세상에 계시하시는 방법의 신비를 인정하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이 부분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가지고 계시며, 제가 출애굽기 3장에 대한 설교 주석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그 독특한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율법을 주신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세우신 그 분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바로 그 분입니다. 우리가 이 서론적인 말씀들에 대해 전체 설교를 할애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 말씀들이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셔서 특정한 민족과 깨뜨릴 수 없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구속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강력한 방법으로 행동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면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부정적인 단어들은 (모든 “no”들과 “not”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매우 긍정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막 그들을 끔찍한 속박에서 해방시키셨고, 이제 그들이 다시 속박에 빠지지 않고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가서 오랫동안 그들의 주인이었던 애굽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단순하게 모방하며 살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습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속박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해방된 삶을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야고보서 1:25)이라는 간단한 규칙들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가족의 아버지이신 좋으신 하나님은 그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가도록 도우려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말씀이 삶을 지배합니다.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은, NIV Study Bible 각주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 대해 포괄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그에게 속한 자들인 그의 언약 백성은 그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그의 주권에 대한 경외심과 그의 지속적인 보살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에게 완전한 복종과 충성과 순종을 다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완악하고 손이 무거운 폭군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로서 그들에게 이 포괄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수세기 후에 죄 많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것을 통해 매우 강력하게 보여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든 차원에서부터 동료 인간과의 관계의 모든 측면에 이르기까지 삶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엄격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율법의 두 측면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 3절부터 11절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고, 12절부터 17절까지는 동료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이 두 번째 부분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 사랑이 서로 사랑의 조건이며 근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섬겨야 할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서로를 돌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고,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수직적인 순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주된 의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 땅에서 그분의 다른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합당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가 오직 한 분 하나님, 즉 자신을 여호와로 부르시는 그 하나님만 경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명하신 대로 그분을 경배합니다. 그분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형상이나 우상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찬양과 간구에 있어서 그분의 이름만 사용합니다. 그분의 이름의 신비로운 단어를 언급함으로써 그분을 조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주 하루를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 헌신합니다.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일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을 들어 이스라엘의 큰 유혹이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여호와 외에 다른 신들을 두고 그 신들을 신뢰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하면 그 분을 붙잡거나 조종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인간의 욕망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형상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감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형상을 제공하셨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은 인간 사회의 기초인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모든 면이 무너집니다. 강한 가족은 순종도 아니고 (왜냐하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서는 안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아니고 (왜냐하면 우리 모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순간에 처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명예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권위에 무게와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명예가 상실될 때, 오늘날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보고 있는 것처럼, 가정과 사회는 붕괴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 생명의 가치, 결혼한 침소의 신성함, 재산을 소유할 권리, 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각각의 명령은 여러 함의와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섯째 계명이 전쟁이나 자기 방어에 어떤 방식으로 관련됩니까? 최소한 이 계명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생존권을 지키고,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성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삶이 충만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계명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내적인 삶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는 생각이나 욕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에베소서 2:1-3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영적인 죽음이 “죄악 된 본성을 갈망하기를 즐겨하고 그 욕망과 생각을 좇는 것”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New Interpreters Bible의 주석은 우리를 본문의 마지막 몇 구절로 이끕니다: “모든 모호함과 불가해성 속에서 인간의 생명은 끝없이 소중하며 침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체주의 사회의 완고함과 시장 경제의 탐욕 속에서 권리와 책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인간적인 삶이 너무나 연약하다는 것이 이제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삶이 너무나도 부서지기 쉬운 이 시대에 우리는 이 계명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그 질문이 나에게 많은 고민을 제기합니다. 18절은 우리가 출애굽기 19장에서 읽었던 신현(theophany)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기 위해 고안된 개인적인 계시, 곧 두렵게 하는 신현을 배경으로 자신의 법을 주셨다고 하는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다고 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들을 치고(출애굽기 19:24)”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순종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의 율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사랑으로 이 법을 주셨다는 나의 주장과 어떻게 일치되는 것입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순종의 열쇠라면, 명백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에는 어떤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더 나아가 두려움이라는 이 모티브와 요한일서 4:18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하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습니까? 이 구절이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접근하는 방식이 변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의 동기입니까? 그러면 그 다음은 감사입니까? 나는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하지 않을 것이지만, 여러분은 이 고대의 단어를 이 시대로 가져오면서 이러한 질문들과 씨름하고 싶어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대해 말할 때, 율법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로 보는 출애굽기 20장과 율법을 성도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부정적인 힘으로 보는 바울의 견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로마서 7:12)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도”(로마서 7:9)라고 말합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에 근거한 삶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다시 종의 멍에를 매게’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5:1).

모든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바울이 율법이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에 대해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가드레일로 사용되기보다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올릴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사용된 것입니다. 율법은 여전히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감사하는 삶의 지침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 때문에 그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조차 우리에게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도 없고 지키지도 않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려면, 우리로 하여금 법을 지키도록 도울 수 있는 또 다른 법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를 돌보셔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로마서 8:4)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5:18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폭군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구약에 예견된 대로 우리의 성화된 삶의 일부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따라 살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지 않을 때, 이스라엘이 시내산 기슭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중보자가 있습니다. 산꼭대기에서의 신현이 그들을 너무나 겁에 질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모세의 뒤를 잇는 위대한 선지자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 더하여,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죄의 속박에 굴복하게 되었을 때, 그분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8:1-3에 나오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바울의 확정적인 설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과적으로 이 본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의도하셨던 대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법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좋은 대로 하라!”는 모토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무법 본능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자유의 땅이며 용감한 자의 고향”인 이 나라의 핵심입니다. (다른 위대한 나라들의 모든 시민들께 죄송합니다.) 사랑받는 노래 “아름다운 미국”(America the Beautiful)은 우리의 본문을 반영하는 듯 이런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오, 아름답도다 순례자의 발길이여, 엄중한 고단함을 통해 자유의 소리를 광야에 울렸기에! 미국인이여!  미국이여!  하나님이 그대의 모든 결함을 고치시리라. 그대의 영혼을 자제하게 하고 그대의 자유를 법으로 지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