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 기슭에서 호렙이라는 척박한 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모세가 바로의 궁정에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목민 목자의 소박한 삶에 정착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흠정역(KJV) 성경은 이 장면이 시작될 때 모세가 “광야의 뒤편”에서 양들과 함께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가끔은 흠정역의 시적인 표현이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인적 없는 곳에서 모세는 이상한 광경을 봅니다. 불이 붙어 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떨기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놀라운 순간, 모세는 그 광경을 자세히 보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모세가 주목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엘렌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도움을 요청하듯” 모세를 부르십니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곧 억압받는 자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져달라고 모세를 부르고 계신다.”
아프리카나 성경 주석은 하나님 계획과 인간의 저항,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전개되는 이 긴장 관계를 두고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그 정체성을 규정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렌즈가 되었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이 역사적 사건은 단순한 과거의 일에 머물지 않고 초월적인 순간이 되었다. 다시 말해 재현 가능한 사건이 되었으며,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젊은이들은 종종 광야의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분명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부르심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happened)”라고 말하듯 말입니다. 이는 마치 이런 느낌입니다. “우리는 그저 광야 한구석에서 우리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하나님이 불쑥 …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분명한 목적을 품고 일하십니다. 죄와 학대, 그릇된 길과 소외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해방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초월적인 하나님의 개입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영혼 구원을 넘어 온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역할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우리는 모두 그 일에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매정한 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알터는 모세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유독 모세에게만 ‘그 사람 모세’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수식어가 붙는다. 이 표현에는 신학적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경계하고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려는 의도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더 구체적인 사실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건국자이자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모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 큰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불러 제사장이 되게 하셨지만, 그 아이는 한밤중에 어른이 심부름을 시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셨을 때, 그의 첫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였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실 때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 부르심은 언제나 낯설고 당혹스럽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이야기를 보면 또 하나의 성경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 외딴곳에주님의사자가나타납니다.
• 전혀 다른 삶의 계획을 품고 있던 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1)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
2)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는 일에 당신을 쓰고자 하신다.
- 하나님의부르심을받은이들은처음에는두려워하고, 그다음에는호기심을가지며, 어느정도저항하기도합니다. 그래서종종기적적인개입이뒤따릅니다.
이 장면은 신약의 또 다른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 한천사가작은마을나사렛에나타납니다.
•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아갈 미래를 그리던 한 젊은 여인에게 나타납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내가 구원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너를 통해 그 구원을 이룰 것이다.”
마리아의 호기심은 결국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두 이야기의 평행 구조는 결코 새로운 발견이 아닙니다. 이미 4세기에 교부 닛사의 그레고리는 마리아를 타지 않는 불타는 떨기나무에 비유하며, 그녀를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거룩한 표상으로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태 안에 품었지만 재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자 엘렌 데이비스는 이 오래된 통찰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이미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새롭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세 이야기를 새롭게 읽도록 도와준다.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알았던 두 사람이 있다면 바로 모세와 마리아일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땅을 함부로 밟으면 즉시 죽는다고 생각했다. 대제사장조차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 목숨을 걸어야 했고, 그마저도 연기에 가려진 채였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도 살아남을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다.
“만약 하나님께 가장 친밀한 벗이 있다면, 그건 아마 모세일 것이다. 광야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따지듯 항변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불평을 받아들이시고 그의 호소에 응답하여 길을 조정하신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이토록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신 경우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기 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 모세와 마리아는 평범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편안하게 머무르셨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실 가장 넓은 자리를 내어 드렸고, 그로 인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면서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훗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선언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불타는 떨기나무의 불꽃,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빛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으리라는 약속이자, 언젠가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 아픔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빛 가운데 마침내 사라지리라는 소망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모세와 마리아의 평행 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이 반전의 묘미는, 미국의 노동절 연휴에 갑자기 성탄 이야기가 등장할 것이라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갑작스럽고 계절에 맞지 않는 전환을 오히려 마음껏 살려 보십시오. 성탄 찬송이나 마리아의 찬가(마그니피카트)를 불러보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일 년 중 언제라도 “세상을 뒤흔드는 노래(Canticle of the Turning)”를 추천합니다.
출애굽기 3:1-15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