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1:15b-2:9 주석

저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가장 큰 증거 중 하나는 성경이 역사상 모든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삶에 적용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학개에서 주어진 예언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후인 BC 520년, 구약 예언 활동의 마지막 기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개가 집중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제는 2019년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이스라엘의 책이 어떻게 현대 북미 지역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학개 선지자가 거듭해서 주장한 바와 같이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520년에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지 적어도 18년이 되었습니다. 선한 언약의 당사자로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만 하면 모든 일들은 잘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아주 확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몇 년 후, 그들은 속도를 늦추고 성전 재건을 중단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혼혈인이었던 사마리아인들의 반대와 다른 이웃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삶의 주변 환경, 특히 자신들의 집을 개축해야 하는 자신들의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536년에 그들은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주택 건축에 집중했습니다. 16년 후인 520년의 일입니다. 16년 동안 주님의 집은 여전히 엉망이었습니다. 반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판벽한 집”을 건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또는 학개의 말대로, 자신의 삶에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하지도 않았고, 번영하지도 않았으며, 열매를 맺지도 못했습니다. 학개는 6절에서 그들의 광적이면서도 좌절된 삶에 대해 요약합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결코 앞서지 못하고, 결코 만족하지도 못하며, 결코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학개는 “너희 행위를 살필지니라”고 거듭거듭 말합니다. 여러분은 부주의하게,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삶을 살펴보면 아마도 당신이 처한 좌절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길에 너무 깊이 빠져있고 그들의 생각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힌트를 주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내]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좋다. 너희가 여전히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희가 선택한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너희의 삶은 황폐하고 공허할 것이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리고 여전히 이 모든 것을 너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최대한 직설적으로 말하겠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너희의 불행한 삶을 야기한 두 주체인, 너희와 나에 주목하라. 너희가 열매 없는 것은 너희의 신실하지 않음에 대한 나의 반응의 결과이다.

포로 생활에서 막 돌아온 이스라엘은, 우리가 반복해서 성경을 읽을 때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이 이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받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순종에 대해서는 상을 주시지만 불순종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반응하십니다. 순종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하거나 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열매로 가득한 우리의 삶으로 그분의 은혜에 응답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징계(혹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지치기)로 응답하십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또 다시 버리신 것은 아닌지 걱정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다시 돌이켜 여호와를 경외하고 순종하기 시작하자(12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노라 … [그리고] 내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한 말씀에 징계를 받고 위로의 말씀에 힘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은 즉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건축자들의 열심은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일한 원수들이 다시 그들을 방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굳세게 할지어다.”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는 할 수 있다. 계속하라. 그렇게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열정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로 21세기와 그 너머로 울려 퍼지는 놀라운 좋은 소식인, 다양한 면을 지닌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조금 있으면(묵시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내가 이 세상 역사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를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또 다른 일들이 올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뒤흔들 것이며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그 “조금 있으면”은 알렉산더 대왕이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국제 질서를 뒤흔드셨을 때 처음으로 발생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드는 결정적인 순간은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를 때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이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과 땅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때 성취되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영광스러운 천사들의  노래로 하늘이 충만했던, 그 분의 탄생에 대한 수태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이 “모든 나라의 보배”이심을 이해한다면 본문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새 성전, 곧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곳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지금의 이 성전” 즉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던 장소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대치되었습니다(골로새서 1장).

따라서 우선 순위에 관한 학개의 어려운 말들은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분의 성전을 우선시하기를 원하셨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우선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필요에 집중할 때 삶이 바쁘고 답답해했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때 우리의 삶은 공허하고 결실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래된 노래 몇개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강림절 찬송으로 “오래동안 기다리던(새찬송가 105장)”로, 2장 7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땅을 뒤흔드실 것이라는 약속이 중심이 된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는 우리 소망이요 힘과 위로 되시니

오래 기다리던 백성 많은 복을 받겠네

두 번째 곡은 찬송가는 아니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탄광 광부의 우울한 마음을 담아냈다. Tennessee Ernie Ford가 부른 곡으로 기억에 남을만한 노래 입니다. 후렴은 이렇습니다.

그는 16톤을 적재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더 오래고 더 깊은 빚을 진 또 하루입니다.

성 베드로, 내게 전화하지 마세요.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회사에 내 영혼을 빚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