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11-14, (15-18), 19-25 주석

코비드19 팬데믹과 이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들은 적어도 일부 크리스찬들이 모이던 방식을 또는 현재 “함께 모이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제한 조치들로 인해 우리들 중 일부는 같은 건물에서 모이지 못하고 원격으로 모여야 했습니다. 또한 일부 기독교인들은 같은 물리적 공간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더라도 다소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 중 일부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습니다. 어떤 이들은 컴퓨터나 다른 기기 앞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어떤 이들은 혼자서 또는 가족들끼리 찬송하는 것을, 특히,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을 거행하는 것을 어렵게 여깁니다.

그러나 “함께 모이는” 이러한 다양한 방식에 상당히 익숙해진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까지 먼 거리를 걸어가거나 차를 몰고 가는 대신 기기만 가지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화면을 꺼둘 수 있기 때문에 외모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면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는 것에 대한 제한 조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일부는 개인 또는 가족의 입장에서 예배에 미치게 될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안전한 데도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혼자서 또는 가족과 함께 드리는 예배가 편안한 습관이 되어 다른 안전한 선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예배자들이 그것을 선호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올 초에 저는 칼빈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James K.A. Smith에게 팬데믹이 예배의 모임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저와 제 동료들에게 성인이 된 자녀들에게 다른 크리스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도록 어떻게 격려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예배는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신학과 정치와 팬데믹을 완화하려는 노력들에 대한 깊은 차이로 점점 더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었습니다. Arthur Brooks와 같은 사회 평론가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북미주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지 보여주었습니다.

일부 크리스찬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공동 예배가 아닌 개인 예배나 가족 예배가 그러한 혐오감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합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지만 반드시 좋아하지 않는 동료 크리스찬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합니다.

히브리서가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가르친 이후, 이번 주 서신서의 교훈을 통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히브리서의 주제인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에 대한 예수님의 우월성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아마도 그것은 일부 독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위험에 빠뜨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 이전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돌아가려고 하는 곳을 상기시키기 위해 유대인 제사장들이 같은 희생 제사를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던 것을 언급합니다. 예전 성소에는 그들이 앉아서 쉴 공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의 일이 결코 끝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유대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충분할 수 없고, 그래서 끝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 노력하는 충분한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라고 부르신 이웃들과의 관계를 누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Will Willimon이 주목한 것처럼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는 피로 상태로 가는 일방통행 티켓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 나타나 “그거 생각해 봤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또는 교회가 우리를 지치게 할 때 누군가 나타나 “이걸 가르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 서 있거나 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신념과 말과 행동을 좇는 종교적 러닝머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25절에 나오는 “함께 모이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 지도록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보통 이 말을 교회에 가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크리스찬들로 하여금 함께 모이라는 단순한 요청입니다. 설교자는 예배를 위해서만 아니라 교제와 음식과 공부를 위해서, 그리고 심지어 봉사를 위해서 함께 모이는 크리스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롭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찬들을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방인에서 형제자매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일종의 가족 상봉과 같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설교자는 함께 모이는 것이 가족 상봉 이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석을 쓰는 데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Tom Long이 자신의 히브리서 주석(Long, Thomas G. Hebrews. Louisville, KY: John Knox Press, 1997)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함께 모일 때, 그것이 미사든 기도회든, 대성당에서든 집에서든, 수백 명의 다른 크리스찬들과 함께든 단 두 사람만이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끄십니다.

하지만 왜 일부 사람들이 예배를 포기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코비드19 팬데믹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혼자서 또는 소수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산길에서 혼자 예배하는 것이 주일에 교회에 모인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훨씬 순수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동료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예배에 지쳐 있고, 또 지쳐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Long이 지적한 것처럼 넷플릭스에서 전보다 더 많은 드라마를 볼 수 있고, 스타벅스에서 더 친절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며, 해변에서 더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교회 건물에서 일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의 팔을 비틀어 헌금을 하도록 하거나, 위원회에서 봉사하게 하거나,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 드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저는 25절에서 “함께 모이라”고 한 말이 24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한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서로를 구체적으로 사랑하도록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선한 일에 대한 ‘격려’를 무시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영원토록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빌립보서 2:10b) 하시는 그 날을 위해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모일 때, 특히 함께 모여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신비로운 하늘의 드라마 속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에게 가까이 이끄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천사들과 성도들의 위대한 합창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물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꽤 열심히 눈을 찡그리고 있어야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Fred Craddock이 Will이라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히브리서 10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는 예배의 본질에 대해 잘 설명해 줍니다.

Craddock은 자신이 어린 시절 매주 토요일 밤에, 어떻게 그의 부모가 자신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옷을 차려 입게 했는 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웃들이 Craddock의 거실에 앉아 성경을 읽고, 옛 찬송가에 나오는 “Bring in the Sheaves”(찬송가 496장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역자 주) 같은 곡을 부르곤 했습니다.

Craddock은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어머니는 “교회에 출석할 만큼 가까운 곳에 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만, 언젠가 진짜 교회와 충분히 가까운 곳에 살게 될 것이니, 지금 그것을 연습하는 거란다“라고 답했습니다.

Will은 매주 그 ‘예배’에 참석하는 이웃이었습니다. Craddock은 Will에게 ‘진짜 교회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Will은 “수백 번”이라고 했습니다. Craddock이 교회가 어떤 곳인지 묻자, 그는 “우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게나. 가끔 외진 곳에 있는 콘크리트 블록 위에 작고 낡은 흰색 판자 교회가 있는데 셔터가 약간 처져 있을 수도 있거든. 하지만 그것만 보지 마시게. 때로 하나님이 자신의 선하심을 숨기시는데, 그런 낡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장 좋은 것들을 숨기기도 하시거든.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을 걸세.” “뭘요?” Fred가 그를 추궁했습니다. “음~ 천장을 올려다 보면, 깊고 진한 파란색을 볼 수 있을 거야. 별들이 빛나고 천사들이 노래하는… 글쎄, 언젠가는 직접 봐야 할 거야, 젊은이!”

Fred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위장”해 좋으신 작은 교회 중 한 곳에서 열린 Will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Fred는 실망했습니다. Will이 말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페인트는 벗겨지고 있었습니다. 별은 빛나고 있지 않았고,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Craddock은 예배가 시작되었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성가대가 몸을 흔들며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회중들은 그 찬양에 동참했고, Fred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천장은 파란색이었고, 별들은 빛나고 있었으며, 천사들이 Will의 안식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