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번 주간 서신 공과에 대한 2018년 주해에서 언급했듯이, 이번 주일 서신 공과 주제는 ‘피흘림’입니다. 피흘림이 너무 지나쳐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내용이 불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문제가 워낙 뿌리가 깊어서 그와 같은 극단적 처방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짐 중에서 죄책감보다 더 무거운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죄책감은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어떤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죄책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죄책감은 특별히 우리가 잘못대했던 사람과 마주칠 때 더 공격적으로 작용합니다.
제가 밀드레드라 부르는 여성은 청소년 시절에 가족과 가족 친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당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녀는 친밀감에 대한 건강한 반응을 하지 못해 이후 수많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롭게도 그녀를 잔인하게 학대했던 남성들과의 평화를 선물로 주셨지만, 그녀는 자신의 불결함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죄책감은 늘 밀드레드를 따라다녔고, 언제든지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물론 많은 현대인들은 그런 죄책감 자체가 부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 애크스트는 자신의 책인, “원더보이: 월스트리트를 훔친 아이, 배리 밍코우”에서 “죄책감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사이코/소시오패스라 언급합니다. 그는 덧붙이기를, “사이코패스는 난잡하며 자체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이들의 비율이 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
물론 양심에 대한 살인 미수는 사회나 문화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나데즈다 만델스담은 소비에트 연방의 초기에 관한 그녀의 회고록인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그 기능이 ‘계급 감정’으로 대체된 이후 신문, 책 또는 학교에서 어떻게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되었는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번 주일 서신공과를 전하는 사람들은 21세기 상황에서 양심의 상태를 청중과 함께 탐구할 수 있습니다. 활동적인 양심은 좋은 정신 건강의 필수 부분인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양심이 얼마나 잘 기능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어떻게 때때로 건강한 방식과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날까요? 그리스도인조차도 때때로 어떻게 우리의 양심을 억누르려고 할까요?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우리의 죄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많은 것을 제공합니다. 히브리서9:9은 참된 구약 신자들은 희생제사 제도가 그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음을 그의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실수로 범한 죄에 대해서만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제사장들은 고의적인 죄에 대해서는 어떤 속죄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14절에 의하면,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실수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너무 자주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우리 죄를 슬퍼하고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백할 때, 우리의 양심조차도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해 죄를 지었음을 고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가 우리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셨음을 압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죄가 영원토록 우리를 주님과 단절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우연적인” 그리고 고의적인 죄 모두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셨습니다.
히브리서9:14의 설교자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실에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지”를 찬양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피를 다른 이들에게 흘리게 하여 성령께서 우리 중 일부에게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책감을 정화하시게 합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피흘리는 일”입니다. 이번 주일 서신 공과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레위기16장이 묘사하는 피흘리고, 안개가 자욱하고, 시끄러운 “속죄일”이라 부르는 날을 다시 가리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제비뽑기로 선택된 황소와 염소 모두를 잡았습니다.
그런 다음 제사장은 동물의 피를 궤와 희생 덮개 앞과 위에 뿌렸습니다. 또한 제사장은 피를 회막과 번제단 위에 뿌렸습니다.
속죄일 전체 드라마가 보여주는 심각성은 사람들의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가리켰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이 모든 희생 제사를 바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개혁파 기독교인들이 하이델베르그 신조에서 고백하듯이, 어떤 피조물도 인간의 죄를 대신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염소나 소도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다른 이들을 온전히 벗어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불(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하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참으로 인간이며 참으로 의로운, 어떤 피조물보다 더 강력하신, 즉 참 하나님이신)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히브리서9:9-10이 말하듯이,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속죄일의 모든 피, 연기, 의식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메시야에게 향하도록 한다고 고백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와 바른 관계를 갖도록 온전히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은혜롭게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방식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그 자신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실제로 그는 대제사장이시며 희생 제물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속죄 제물을 드리셨고 속죄 제물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죽음이라는 ‘사막’으로 보내신 “희생양’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동물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더이상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염소와 송아지 대신 희생 제물로 바친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진실로, 그리고 온전히 세상의 죄를 제거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10:19에서 그의 독자에게 상기시키는데,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 어떤 종교적인 전문가들, 즉 제사장, 랍비, 목사를 통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더이상 중재자, 하나님과 기독교인들을 이어줄 어떤 사람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특히, 기도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20세기와 21세기의 폭력으로 인해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속죄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이러한 유혈사태로 인해 설교자와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필요성에 대해 신중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모든 방식을 온전히 요약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실, 성경은 그 구원의 효과를 이야기 하기 위해 다른 유비들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신실한 성경적 설교자와 교사들은 본문이 제기하는 구원에서의 피의 역할을 정직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참혹한 죽음이 입양된 그의 형제자매들의 주저함과 불확실성을 제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가 은혜롭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서10:9이 말하는 “확신”또는 담대함을 갖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히브리서10:22이 말하는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갖고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한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겸손하고 자신감 있게, 그리고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거리를 두라고 계속해서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임명된 대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것마저도 일년에 한 번 뿐이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초대가 주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히브리서9장은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강한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겸손하지만 담대하게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존 미챔은 “운명과 권력”이란 제목으로 조지H.W부시 대통령의 전기를 썼습니다. 그 책에서 부시 대통령이 죽는 날 까지 그를 괴롭혔던 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 부시는 그의 친구들에게 자석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좋아했고, 미챔이 표현하듯이, “그의 궤도 안에서 보호받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 부시는 자신의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는데, 유대인 친구를 묘사하면서 반유대주의적 비방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예민한 부시는 평생에 걸쳐 이 잘못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70년이 지난 후 책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부시는 1930년대에 있었던 그 일에 대한 죄책감에 떨었고, 울먹이며 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감각에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이 유대인 친구는 오랫동안 부시 지지자와 친구로 남았습니다.)”
히브리서 9:11-1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