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유능한 설교자들처럼 모세도 이야기로 설교를 끝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장에 걸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설명한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설교의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의 마지막 정거장에 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 강 가에 서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동경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그들의 삶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라를 그들에게 상기시켜 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그 토라를 각인시키기 위해 모세는 한 국가와 개인으로서 자신들의 존재의 중심에 있는 ‘그 이야기’를 사용하여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상기시킵니다. 그 이야기는 그들이 마침내 도착하게 될 약속의 땅에서 수행할 의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설교자는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이 본문을 기독교적 배경에서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과 같은 사순절 첫째 주일에 말입니다. 이 독특한 유대 의식에서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요단 강변에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빈 무덤 건너편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에 비추어 이 본문을 어떻게 읽고 설교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저자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다. 모든 학자들은 오늘 분문이 모세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압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신명기의 마지막 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다른 사람이 모세의 긴 설교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이론 중 하나는 이것이 요시야의 개혁 시대(왕하 22-23장) 즈음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길에서 멀리 떠나 있었고, 요시야 왕은 그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의지하지 하는 죄와, 적대적인 세력에 맞선 숙명론, 자연의 힘에 대한 무관심, 주변 나라들의 신과 여신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죄에 빠졌습니다. 요시야는 그들에게 다시 토라로 돌아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에게 그들의 구원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야기에는 토라를 수여하신 사건도, 천지 창조도, 아브라함을 부르신 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몇 사람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여정으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은 땅이 없는 한 사람(“방랑하는 아람 사람”)이 속박의 땅이 된 곳으로의 간 이야기, 즉 여행 이야기입니다. 그 후, “주 우리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은 후, 그 새로운 나라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들이 그 땅에 도착하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그곳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기억해야만 하고 여호와께 특별한 제사를 드려야 하고 자신들이 얻은 기업에 대해 축하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약속을 지키셨는지, 우리를 어떻게 우리의 기업으로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로 우리의 첫 번째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하신 손과 뻗으신 팔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복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축하에는 “레위 인과 우리 가운데 거류하는 객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빈 무덤이라는 실체를 가로질러 신명기에 있는 이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사려 깊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사순절 여정을 진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기업에 대해 생각할 때면, 베드로전서 1:4과 같은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구절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요청합니다. 그 구절은 우리의 기업이 궁극적으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땅”에 초점을 맞춤으로 인해 신명기 본문은 우리가 얻게 될 마지막 종말론적 복에 초점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 한 점 소유하지 못했던 상태에서 출발하여 속박의 땅과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이었습니다(3절).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땅”이 그들 이야기의 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 땅이 나의 집”이며, 나는 “그냥 지나쳐,” “저 푸른 하늘 너머 저 위 어딘가에”(옛 영성가가 말했듯이) 있는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순절의 알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땅으로부터 구속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새로워진 땅을 위해 우리를 구속하러 오셨습니다. 저 멀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가 증명해 주듯이 우리의 믿음은 땅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땅이 “주어졌”다는 구절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주의하면서 본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어 나탄(주다)은 7번 사용되는데 그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집트가 이스라엘에게 고된 노동을 주었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나머지 여섯 번은 주님께서 땅을 주셨다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피비린내 나는 정복 전쟁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선물로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기억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이야기와 우리 이야기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한 손과 펼친 두 팔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와 우리 가족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행한 의로움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절에 “오직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하는 본문입니다.
천재가 되어야 이스라엘이 범한 죄들이 우리 삶에서 재생산되고 있음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데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적대 세력에 압도되고 우주의 광대함 앞에서 의미를 잃어가면서 숙명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음란한 문화에 현혹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사순절은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죄의 광야로 나가 방황하고 있는 죄에 대해 회개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사순절은 티끌과 재로 회개만하는 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한 우리의 슬픔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기쁨이 늘 승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기쁨은 신년 전야의 현란한 축하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로 우리의 첫 번째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려 깊은 제물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10절).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속 이야기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여행 중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기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구원 이야기를 기억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체적, 영적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종국적으로 기뻐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가 좋은 것을 붙잡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레위인과 우리 가운데 거류하는 객”과 나누는 것으로 기뻐해야함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내용들이 명확하지 않다면 신명기 16:11,12을 참조하십시오. 우리의 기쁨은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들, 우리와 함께 이 땅에 있지만 우리가 가진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관대함으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회개와 기쁨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지, 그분의 구원 사역이 당신의 존재에 얼마나 중요한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이 빠졌던 죄들인, 자기를 의지하는 일, 허무함, 음란한 종교에 대한 집착 등의 죄들에 대해 회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회개에 대한 전체 개념이 전체 유대-기독교 이야기를 “사람들이 전에 믿었던 어리석은 이야기” 박물관으로 격하시킨 포스트모던 문화와 얼마나 이질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반면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기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얻게 되면 가진 것을 누릴 수는 있어도 주님 앞에서는 기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망각에 빠졌을 때 기뻐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는 강아지나 아이들을 보면서는 잠시 웃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에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 잊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그 이야기를 상기시켰을 때에만 잠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설교 끝에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는 설교의 핵심입니다.
저자: Stan M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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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6:1-1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