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계시에는 때때로 끝없이 이어지는 소름 끼치는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강렬한 박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 엄청난 고통을 묘사합니다. 만약 우리가 요한 계시록이 “해피 엔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도 6~7장 정도 읽다가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부 현대 기독교인들은 계시록이 묘사하는 소름 끼치는 사건들이 여전히 우리의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요한이 처음 편지를 보낸 교회에서는 이미 그가 묘사한 것과 같은 비참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편지를 보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비롯한 큰 역경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설교 주석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에게 준 Craig Barnes가 지적했듯이 기독교인의 고통은 초대 교회의 기대와는 상반 되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직후에 이 땅에 재림하여 왕국을 세우실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들이 그리스도의 탁월한 재림을 기대했던 마지막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이 후 하나님의 백성 중 적어도 일부는 같은 것을 상상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대량학살을 통해 잠재적 적그리스도 인물 목록을 작성하는 것처럼 보였던 20세기에 “바로 이것이다. 세계는 곧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섬기던 교회의 한 노부부는 전쟁시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20년 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반올림의 숫자로 일하시므로 새 천년의 시작이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신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인 Martin Marty는 세상이 어떤 의미에서 항상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1세기의 세계는 요한이 우리 본문을 기록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끝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비유적으로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를 이루던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의 지배는 500여 년 전에 끝났습니다. 20세기 미국의 세계 지배는 9·11로 끝났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Barnes가 지적했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당신의 세계가 끝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종종 중요했던 여러 가지의 끝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낼 때 우리는 그들과 우리 모두를 위한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이번 주일 Lectionary 서신 본문에서 요한의 메시지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때때로 경험하는 상함과 마음의 고통과 실망이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한다는 신호입니다.
요한은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믿음 때문에 큰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계시록을 썼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그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1) 때를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완전히 멸하신 후 다시 만드실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거대한 규모로 개조하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옛 방식을 멸하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고대의 위협이였던 바다를 새 예루살렘의 하강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대체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다시 말해서, 머지않아 하나님은 정신적, 육체적 질병, 폭력, 기후 변화를 포함하여 현재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를 세우심으로 그러한 위협을 그분 자신으로 대체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 가운데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심으로 그 역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서신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감동적인 메아리가 울리면서, 요한은 그 영광스러운 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4)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슬픔, 질병, 소외, 근심, 의심으로 종종 우리는 눈을 적시는 눈물 하나 하나를 우리 눈에서 부드럽게 닦아 주실 것입니다.
더욱이 요한은 본문에서 머지않아 눈물을 흘릴 이유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4). 눈물과 슬픔은 새로운 창조에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인을 제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21장을 선포하고 듣는 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놀라운 비전입니다. 뇌종양, 치매 및 기타 불치병과 같은 것들로 인한 죽음은 이 첫 번째 지구에서의 작은 삶을 위협합니다. 건강 악화, 가정 파탄, 실직, 전쟁, 민족적 증오와 같은 것들이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때때로 요한이 단지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성경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결국 지금 거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결국, 지금, 이미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십니다.(3).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힘 주시고 격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입양된 자녀로 지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기독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5절에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우리 본문에서 실제로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고 있노라”고 주장하십니다. 우리 눈에서 결국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보십시오. 물론 그것은 새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서만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슬퍼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을 선포하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깊이 슬퍼했지만 결국에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습니까? 계시록 21장을 듣고 읽는 사람들은 여전히 울며 때로는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슬픔을 덜어 주시며, 하지만 천천히, 이미 우리의 눈물을 마르게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미 “죽음”(4)의 의미를 바꾸지 않았습니까? 죽음은 아직 죽어 있는 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들과 딸들의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역을 끝내지만 우리의 존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이제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들어가는 문일 뿐입니다.
그러나 새 창조에 대한 요한의 비전은 우리의 죽는 방식뿐 아니라 당신과 내가 사는 방식도 바꿉니다. Barnes는 “천국은 우리가 죽은 후 단지 가야 할 미래의 장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영감을 주기도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늘날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킨 많은 사람들은 장차 올 세상에 대한 요한의 비전을 가장 강하게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들은 노예, 여자, 어린이를 인도적으로 잘 대우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최근에는 William Wilberforce와 같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20세기의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목사는 우리에게 피부색에 무관한 사회에 대한 비전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가져올 신세계에 대한 요한의 설명대로 이 세상에서 일부의 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남녀들은 새 창조의 삶에 대한 우리 본문의 묘사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처소가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그가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로다”(3)는 하나님의 백성의 사역에 대해 무엇을 암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대표자들인 우리들을 적어도 비유적으로라도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요한의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4)는 말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애통하라는 바울의 요청과 유사하게 들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의 적극적인 대리자로서 병든 자와 죽어가는 자를 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라는 초대입니다.
“처음 것들(옛 것)”(4)은 새 땅과 하늘에서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반 친구가 왕따를 당하는 학생을 옹호하거나, 투옥된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받거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다 효율적이고 생태학적으로 경작하는 건전한 방법을 배우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사랑스럽더라도 새 창조의 삶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삶이 그 영광스러운 삶을 미리 맛보는 것이 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서 요한은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제 하나님의 처소가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그가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를 듣습니다. 그러나 물론 하나님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임마누엘”의 경험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은혜롭게 계획하신 새 창조의 경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Frederick Buechner는 그의 책 A Room Called Remember에서 말합니다. “이 하나님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지극히 높으시고 영원무궁토록 거하시는 이’가 첫 번째 답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아무나 바라볼 수 없는 분이다. 왜냐하면 시공간에 갇힌 인간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의 실재를 장님의 눈이 빛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자연과 역사의 무언극과, 선지자들과 성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의 유창하지만 혼동스러운 말을 통해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그분을 알게 하셨다.”
주석: DOUG BRATT
요한계시록 21장 1-6절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