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21 주석

우리는 50일간의 부활을 축하하는 절기의 마지막에 와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어떻게 전파 되었는지에 대한 누가의 설명에서 이제 빠져 나와, 이제 그 전체 이야기에 이르는 연결 통로에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매혹적입니다. 이 오순절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갑니다. 누가가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의 선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했듯이(눅 4:18-19), 교회의 사역은 성령이 온 교회에 내리심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교회가 땅끝까지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징표로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 땅끝이 교회에 이르렀습니다. 누가의 예술성은 인상적입니다.

1절은 무대를 설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오순절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날은 밀 추수의 끝을 축하하는 날이었으며, 이제 그 날은 세상을 추수하는 날의 그 시작을 축하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순례해야 할 3대 명절 중 하나인 오순절에는 예루살렘 거리가 세계 각지에서 온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따라서 모두 120명쯤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 장소는 아마도 그들이 날마다 지냈던 성전 경내였을 것입니다(눅 24:53). 아마도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권능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리라 약속하신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무대가 설정되었습니다. 폭풍전야의 고요입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찼습니다. 바람과 함께 불이 임했습니다. 즉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령의 처음 오심이 후대에 기억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비 체험이 아닌 공개적인 사건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불은 단지 동반된 징조일 뿐입니다. 오순절의 중심 사건은 120명 모두(아니면 12명만?)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뒤이은 설교를 통해서 저는  120명 모두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초대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위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그 목적은 그들이 땅끝까지 예언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는 많은 논란이 된 구절의 의미입니다. 일부 은사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논의된 방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이 축복을 받기 전에 통역이 필요한 동료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말하여진 하늘의 언어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언어들”은 번역할 필요 없이 외국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제자들이 말한 외국어입니다. 이 은사는 불신자들에게 예언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령의 다른 많은 은사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이 예언의 은사가 교회로 하여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 주된 은사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마지막 추수를 미리 맛 볼 수 있도록 이미 땅끝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셨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는 유대 신앙의 지지자들이었지만, 그 당시 알려진 전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9-11절에 있는 누가의 국가 목록은 예수님 이야기(눅 1:3)에 대한 그의 광범위한 연구의 한 증표입니다. 인도에서부터 아프리카, 유럽, 중동 전역에서까지 사람들이 추수를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결국 그들이 그 추수한 수확이었습니다.

그들의 회심은 그들이 듣고 있는 것에 대한 완전한 놀라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거센 바람이나 타오르는 불 때문에 회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임에 분명했던 제자들이 외국에서 온 자신들의 언어로 전파하는 복음을 들을 때 회심한 것입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더라.”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이적들은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이 놀라움과 조롱은 이후의 모든 복음 전도 설교의 패턴으로 자리잡은 설교인 성령의 새 시대에 행해진 첫번째 설교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고 따라야 할 메시지를 맥락화합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전파합니다. 셋째, 그는 청중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날 3,000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와 여러 시대에 걸친 교회의 이야기의 요약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들의 주의를 끄는지 주목하십시오. 그는 군중들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Fred Craddock이 말한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권위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놀라는 자들과 조롱하는 자들 모두에게 말하기를, 경청하라고 명령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약간 유머러스하게 반박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예언의 은사를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성경에 대한 주의 깊은 주해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과 사람들의 삶에 대한 담대한 적용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군중이 경험한 것에 대해 베드로는 주해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모호한 한 소선지서 본문에로 방향을 바꿉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베드로는 욜 2:28-32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사용하여 우리가 이제 “마지막 날”에 들어갔다고 알려줍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지구가 맞이할 맨 마지막 순간이라는 묵시적인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께서 이스라엘과 세계에 구원을 가져오시는 오래 전부터 약속된 날을 의미하는 구원적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길고 복잡합니다. 17절과 18절에 언급된 초기 말세에는 만민에게 성령이 임함과 많은 육체의 구원과 천국의 점진적인 임함을 볼 것입니다. 마지막 말세에는 악인의 심판과 세상의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두 시기 사이에서 우리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마지막 날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성령에 의해 권능을 받고 인도를 받아 그분을 위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 초기 말세에 주목할만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령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집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 나이,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남자들만이 아니라, 노인들만이 아니라, 제사장이나 왕과 같은 특별한 직분을 맡은 노인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종과 상전들 모두가 성령을 받고 예언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예수님을 증거할 때 말입니다.

둘째, 복음이 전파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위에서 설명한 대로)에 의한 방법과 표적과 기사에 의한 방법입니다. 이제 요엘의 예언은 하늘과 땅의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피와 불과 연기로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묵시적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분명히 그 중 일부는 마지막 말세, 즉 “주의 크고 영화로운(두려운) 날”이 임함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예언의 은사에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과부를 돌보고  돈으로 구제하는 것과 같은 다른 표적과 기사가 함께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기적이 그쳤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더 기적적인 표적과 기사가 계속해서 존재하는지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백성이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만큼 사랑과 자비의 행위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진행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셋째, 성령 부어주심의 주된 효과는 회심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여러 일들을 하시지만 성령의 모든 역사는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설교의 첫 부분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구원에 대한 부르심으로 끝이 납니다. 성령은 3,000명의 사람들을 그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움직이십니다.

오순절의 요점은 바람과 불과 방언이 아닙니다. 오순절의 요점은 땅끝까지 전파되어 마침내 세상을 구원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받은 복음 선포입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순절의 요점입니다.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증거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신 예언의 은사로서,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과 모든 종교의 조롱하는 자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제가 이 예화를 몇 년 동안 보관해 왔기 때문에 너무 구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화가 강력한 그림을 제공하기 때문에 공유합니다.

“9월 11일 이후로 John Vigiano는 거의 매일 세계 무역 센터였던 70피트 깊이의 크레이터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발견하는 순간에 그 곳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John Vigiano는 테러 공격으로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10월에는 수색 구조견이 뉴욕시 경찰인 그의 아들 Joseph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Vigiano는 여전히 누군가가 뉴욕시 소방관이었던 John II를 찾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사하고 운반해야 할 남은 잔해가 이제 수십만 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Vigiano는 여전히 DNA 검사로 확인할 수 있는 팔, 손가락, 귀 등 아들의 작은 부분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계속 바라고 있습니다. 그 테러 공격은 단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작게 부숴버리고, 소각하고, 태워 증발시키는 것이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희망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의 몸은 그 단어의 가장 정확한  의미로 분해되었고, 산산이 부서졌으며, 바람에 날아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John Vigiano는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적절한 장례를 치러 주고 싶었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의 가족이 다시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Washington Post에서 이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저는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고 계시며 죄로 짓밟힌 세상의 잔해를 바라보시며 그 분의 잃어버린 아들과 딸들과 그 분의 부서지고 흩어진 백성들을 찾으려고 기다리시는 하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무력하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일 이상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고 집으로 데려와 온전케 하시려고 독생자이신 다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부서진 자녀들을 다시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흩어진 인류 중에서  한 새로운 백성을 그분을 위해 재창조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구덩이에 들어 오셔서, 잃어버린 자들과 흩어진 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셨으며,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할 힘도 없는 소수의 구조대원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그 때 오순절이 임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이 군중들이 물은 질문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초대 기독교인들이 지구 상의 여러 언어로 복음을 전했을 때, 전 세계로부터 모여 온 유대인들이 새로운 믿음의 한 가족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4은 오순절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수세기에 걸쳐 흩어지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연합하였습니다. 오순절에 시작된 선교는 John Vigiano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그의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