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조나에 있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루터교 목사는 매년 그가 행하는 청지기 직분 설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의 성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가 그 설교를 광고할 때, 그들은 한 목소리로 모든 성도들이 청지기 직분 주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합니다. “아 안돼!”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당신이 아모스에 대해 다시 설교할 것이라고 말할 때 당신의 성도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아 안돼!” 우리는 지난 주에 그것을 했고, 그것은 정말 침체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우울할 것입니다. “아 안돼!”
아 그렇습니다. 당신이 용기만 있다면, 그리고 서구 문명의 많은 부분을 분열시키는 엄청난 소득 불평등을 낳은 사회적 불의에 대해 도덕적으로 분노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고 당신의 회중이 그것에 대해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말로 아모스 8장에 대한 설교를 고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 정의의 전체 문제를 가장 엄격한 용어, 즉 묵시적인 용어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8장에는 네 개의 연속된 환상 중 네 번째 환상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환상에는 동일한 메시지가 점점 더 강력하고 최종적으로 반복됩니다. 각 환상은 이미지(메뚜기 재앙, 맹렬한 불, 매달려 있는 다림줄, 이제 잘 익은 여름 과일 바구니)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 이미지는 하나님이 그의 파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가장 온화하고 심지어 유쾌해 보입니다. “익은 열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끝”에 해당하는 단어와 유사합니다. NIV는 언어유희를 통하지 않고 이 아이디어를 포착합니다. 열매가 익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익어서 따고 먹으며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익은 열매는 종말의 그림을 말합니다. 드디어 온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리라”고 언약의 이스라엘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전 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자신에게로 데려 오려는 하나님의 반복적인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지만 각각은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특히 4장에는 강력한 후렴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6, 8, 9, 10, 11절).” 이어서 아모스 4:12에는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만남은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한 인내의 노력을 끝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자주 말씀하시지 않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서 말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우리는 종말의 트라우마를 묘사하는 거의 단절된 외침을 듣습니다. “성전의 노래는 통곡으로 바뀔 것입니다. 수많은 시체가 사방에 던져 질 것입니다. 잠잠하라!” 이 충격적인 텍스트는 우리가 말씀과 말씀의 백성에게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왜 이 재앙이 그들에게 임하였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택한 백성을 이렇게 벌하시겠습니까? 4-6절은 사회적 불의를 직접적으로 지적합니다. 다른 곳에서 아모스는 법원의 부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상업의 탐욕과 속임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정죄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과장이시군요, 하나님.” 이렇게 우리는 이스라엘이 반응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체적이십니다. 너는 사고 파는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 너는 너의 거룩한 날들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5절). 너는 예배보다 장사를,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상업을 더 좋아한다. “탐욕이 선”이 되었고 “탐욕이 신”이 되었다.
그들의 우선 순위가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행도 왜곡되었다. “측정을 건너뛰고, 가격을 높이며, 부정직한 척도로 속이는 것….” 나는 건포도 밀기울의 내 상자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16온스에 3.99달러를 지불했지만 지금은 상자 크기가 약간 변경되어 12온스에 3.99달러를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정육점 주인이 손가락으로 저울을 누르고 사과 얼굴 작은 노부인이 위로 밀고 있는 고전적인 Norman Rockwell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밀가루의 쓸어 모은 것까지 판다’는 글을 읽으면 햄버거에 들어가는 ‘분홍색 끈적이’라는 역겨운 기사가 떠오릅니다.
이 만연한 속임수의 결과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은 더욱 더 뒤처지게 되고 결국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 돈을 대출하기까지 이른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대출자의 노예가 되며 초라한 샌들을 담보로 삼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집니다. 이스라엘의 결론은 이웃을 돌보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익의 신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 이 본문에 대해 설교할 때 사업은 나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아니며 이윤은 악마가 아니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사업은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에 관한 것이며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시대를 초월한 사업 수행 방식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익은 단순히 노력과 위험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퉁명스럽게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미친듯이 날뛰는 사업, 무관심한 자본주의, 이익이 상업의 유일한 목표―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에 대한 이 심판에 의해 입증되듯이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탐욕과 속임수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큰 둘째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미워하십니다.
이러한 사업상의 죄는 우리가 지난 주에 들은 것처럼 종교의 변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종교가 정부, 기업, 사회 전체에서 현상 유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왕과 CEO, 문화의 지도자가 하나님보다 중요해지면 그 문화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 하는 바로 그 행동이 결국 그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맘몬은 숭배자들을 소멸시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이며 우리는 아모스 8장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의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에게 무디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솔직하게 전파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7-12절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사회적 불의가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하는 이유임을 말씀하십니다. 정직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비난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본장의 끝까지 계속 가야 합니다. 자유주의적인 사회적 아젠다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은 가혹한 형벌을 의미한다는 이러한 충격적인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탐욕과 속임수로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교만함으로(즉, 자기를 가리켜?)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을 내가 영원히 잊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하셨느니라.” 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편 103편)” 그리고 누가 새 언약에서 “내가 그들의 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렘 31장)”라고 약속합니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아모스 4장에서 앞서 언급한 구절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완고하게 대적하고 반역했으며 하나님은 그들 속에 하나님을 두려움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의 나라와 그들의 삶을 파멸시킬 우상 숭배와 불공정의 가증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무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세기 동안 그들을 참으셨지만 하나님은 결코 계속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끝이 이르렀고 그분은 그들이 한 일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이것은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침내 용서하시고 회복시키겠지만 사랑하는 나라를 망친 죄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음은 머리털이 서게 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묘사입니다. 그 땅이 지진과 같이 진동하며 나일 강의 범람 같이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 태양은 일식처럼 정오에 질 것입니다. 자연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에 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축제 잔치는 장례식으로 될 것이며 온 나라가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를 깍고 비틀거리며 외아들을 잃은 부모들처럼 애도할 것입니다.
최악으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고난의 때에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지시와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면 하나님은 잠잠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흉년이 들 것입니다. 자연이 흔들리고 그들의 나라가 멸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보내질 뿐만 아니라 더 최악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거듭거듭 말씀했지만, 그들은 아마샤가 아모스 7:12, 13에서 아모스에게 말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꺼져라. 돌아가라. 닥치고 예언하지 말라.”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영원히 잠잠하지 못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이 삶과 땅을 재건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어 육신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운데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놀랍도록 부정적인 예언을 읽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이 모든 형벌은 하나님의 사랑, 강인한 사랑, 엄한 사랑, 틀림없지만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3:2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큰 사랑이 큰 죄를 만나면 큰 형벌이 따릅니다. 십자가는 그 궁극적인 증거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죄를 그냥 사해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삶에 너무나 파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실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의 인간성과 의지를 빼앗야만 우리를 멈추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되돌려 주시고 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경험하게 하십니다(“죄를 짓는 영혼은 죽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자비로 ‘말씀’을 우리의 죄와 죄의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짊어지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불의의 죄의 심각성을 알도록 하십시오. 심판의 현실에 대해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의 큰 죄에 대해 행하신 일에 대해 복음을 전할 때까지 끝내지 마십시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이기십니다. 그것이 문화에 매진된 성직자들, 탐욕을 신으로 삼은 사업가, 고통 가운데 신을 저주한 가난한 이들의 희망입니다.
예와 아이디어
죄가 죄인에게 되돌아 온다는 생각은 심술궂은 늙은 보수주의자들만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의 영적 버전입니다. 모든 행동에는 동등하고 반대되는 반응이 있습니다. 우리 죄의 반동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타격을 가할 대리인을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최근에 북미 문화권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25만 달러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사실, 그 이상입니다. 아이를 키우려면 부모의 삶이 희생 되야 합니다. 모든 부모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자신을 먼저 돌보는 것을 점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의 복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 어려운 현실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에 집중하고 단순히 자녀가 스스로를 돌보게 하는 것을 방치라고 합니다. 때로는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관심한 부모로부터 아이를 때어 놓고 데려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자녀들을 보내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Sermon Commentary for Sunday, 7월 17, 2022
아모스 8장 1-12절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