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8편은 많은 찬양 시편들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서약이라든지 또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찬양한 동기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온 땅과 열방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 또한 나타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편과 마찬가지로 세부 사항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고대 기도문들이 오늘날에도 우리 자신들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우리 삶의 세부 사항을 채워 넣을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시편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한 기도서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바로 이 시편들이 대부분의 시대, 사람, 장소 및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 주석을 위해 6절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 구절에 포함된 내용은 시편 8편과 113편을 비롯한 다른 많은시편에서도 공유됩니다. 아마도 타 종교 전통에 속한 고대 근동의 사람들도 자신의 신과 여신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다른 고대 종교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함과 권능과 위엄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모든 종교는 그들의 신에 대해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실, 신을 인간과 구별하는 주요 요소는 바로 그들의 초능력, 그들의 경이로움, 그리고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힘입니다. 역사상 작고 다루기 쉬운 신을 숭배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죠?
대부분의 다른 신앙에서는 신을 구별하고 신의 존재와 인간 존재 사이에 실존적 간극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 힘입니다. 더우기 신의 장엄한 능력이 두려움과 위협을 통해 사람들을 긴장하고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제우스를 화나게 한다면 올림푸스 산의 번개가 그 사람의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고 두려워 합니다. 바벨론 신 마르둑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다음 해 수확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집트의 태양신 레이와 농작물이 자라도록 나일강의 범람을 다스리는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들을 경배하든지 그들의 저주를 당하든지 두 경우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처녀를 화산에 던져 넣고 신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자녀를 희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들은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졌기에 그들의 힘이 발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든 했던 것입니다.
물론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어느 정도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천둥을 치셨을때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을 대신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거룩함은 가볍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성산을 만졌던 사람들이나 조금 후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약궤를 사적인 장신구처럼 취급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 능력의 파괴력을 몸소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신앙이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 그러한 두려움과 유사한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편에서—특히 시편 138:6— 이스라엘에게 가장 순수한 경이와 기쁨과 헌신을 불러일으킨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우리와는 극명히 다른 초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열렬한 찬양을 불러 일으킨 것은 우리의 모든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목표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들과 가까이 거하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죄가 그 계획을 망쳤지만 하나님은 더 가까이 오시겠다고 계속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미리보기로써, 하나님은 작고 연약한 우리를 주목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고아, 과부, 이방인, 취약한 이들 모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의 곤경, 가부장제 사회에서 보호해 주는 남성이 없는 여성이 직면한 위험등이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로 시편 138: 2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 분의 신실하신 사랑 입니다.
때때로 “자애” 또는 “친절한사랑” (lovingkindness)으로 번역되는 이 히브리어 헤세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 번째 이유로서 시편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일반적이고 거리를 두는 종류의 은혜와 친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깝고 개인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친절한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하갈과 한나 그리고 룻과 같은 개인들의 (주로 여성들을 소개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윗에게도 그 친절한 사랑을 베푸셨고 다윗은 므비보셋과 같이 불운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의 전능한 능력 뿐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을 어떻게 친절한 사랑으로 전환하여 한 번에 한 사람에게 레이저처럼 집중할 수 있었는지에 있습니다 (한 번에 한 연약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우리에게 임했을 때, 그것은 제우스의 번개처럼 위협적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채우고, 따뜻하게 하고, 압도하고, 사랑의 은혜로 감싸줍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이유를 우리에게 설명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친절”(kindness)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친절을 권력과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친절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차분합니다. 권력은 딱딱하고, 열렬하고, 위험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 안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딱딱하고 위험한 것과 합쳐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위대함은 모든 연약함과 결함 투성인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그분의 사랑을 비추시는 능력에 있습니다.
5절 끝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위대하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6절로 이어집니다. 그 영광의 참된 위대함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놀라운 친철한 사랑으로 작은 것들, 작은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얼마 전 들은 설교에서 Tom Long은 친절함의 영적 열매에 대해 말하면서 친절함의 주요 동기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깊이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외적 결점과 모습 뒤로 각자의 내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빛나는 형상을 봅니다. C. S. Lewis는 그의 유명한 설교 “영광의 무게”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언급했습니다. Lewis는 만일 우리가 주변 사람들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부활한 존재로 변모할 때 나타나는 모습을 바로 지금 볼 수 있다면 바로 엎드려 그들을 경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찬란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낮아지셔서 보잘 것 없이 작은 우리를 돌보실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와 결점 뒤로 언젠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그 신성한 형상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한편, Long과 Lewis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것을 찾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가 조금 더 친절해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절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Sermon Commentary for Sunday, 7월 24, 2022
시편 13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