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4-17 주석

부모들은 통상 못생긴 아이들보다는 매력적인 아이들을 더 잘 돌봅니다. 적어도 New York Times의 2006년 판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캐나다 연구원들은 여러 다른 슈퍼마켓을 14번 방문하여 관찰했습니다.  400명 이상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관찰한 후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신체적 매력이 차이를 만든다고 추론했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원들은 자녀가 더 매력적일수록 부모가 자녀를 식료품 카트 좌석에 앉힐 확률이 더 높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외모가 매력이 없는 아이들은 부모의 시야에서 벗어나 10피트 이상 떨어져 있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알버타 대학의 인구 연구소의 전무이사이자 연구팀의 리더인  W. Andrew Harrell 박사는 이러한 현상에 진화론적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매력적인 아이들은 최고의 유전 인자를 물려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최고의 보살핌을 받는다고 Harrell은 주장합니다.

“많은 동물들처럼 우리도 가치에 따라 자원을 분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사람을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요소는 많습니다. 육체적인 매력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부모들이 매력적인 자녀들을 “매력 없는” 자녀들보다 더 잘 대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려면 훨씬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께서 매력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못생긴 자녀들보다 더 잘 대해 주신다면 어떨까요?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만이 영원하고 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우리는 . . .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 양자된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고백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가장 아름다운 자녀를 최고로 대우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큰 곤경에 빠질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 그를 유혹할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온전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성적으로 매력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만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그런 힌트가 있습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말은 대담한 비도덕적 삶의 형태를 말하거나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과 서로에게,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다면, 우리는 너무 자주 그러한 죄된 본성에 따라 기꺼이 살았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의보다는 우리 자신의 의를 선택하고, 순종보다는 불순종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사탄과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는 것은 생명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거나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생명보다 죽음을 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마치 자기 자신의 주인인양 사는 사람들은 소망과 목적을 죽이게 되며, 결과적으로 억제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행동하고 성령을 따라 산다면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죽음보다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우리의 타고난 성향을 죽이도록 내어드린 사람들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 생명 가득한 길을 선택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준비 시키신 사람들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하는 삶을 삽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늘 오순절 주일 본문에서 똑같이 유효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된 본성을 따라 사는 것과 성령을 따라 사는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예를 들어, 빅맥과 와퍼를 선택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사실 이것은 생명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선택하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리 스스로는 이렇게 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사탄과 죄와 죽음은, 심지어 우리의 의지까지도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아무리 가장 선한 사람들이라도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당신과 나를 사탄과 그의 깡패들에게 종노릇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정체성을 주시고, 우리를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쁨으로 그분께 순종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이익과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위상과 신분은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바울이 15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읽기가 그리 쉽지 않은 책인, Khaled Hussein의 Kite Runner는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강력한 책들 중 하나입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장한 Amir가 그 이야기의 나레이터입니다. 그는 일종의 “두려움의 노예”입니다. 어린 Amir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신체적 상해에 대한 두려움 및 기타 여러 다른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그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의 동기가 됩니다.

특히 가슴 아프게도 Amir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종이자 친구인 Hassan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두려움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Kite Runner에서 나중에 Amir가 하는 대부분 선행의 동기는 두려움보다는 용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두려움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 고통, 죽음, 심판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도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삶의 동기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과 나를 은혜로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케하셨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 동일한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이 이름은 감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친밀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공적인 이름이십니다. 그렇게 동일한 방식으로 아주 개인적으로 심지어 간절하게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결국, 마가복음 14:36에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서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부르짖으십니다.

“아바”는 확실히 매우 친밀한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아빠”라는 단어와 비교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바”라는 명칭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명칭만은 아닙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 “아빠”는 또한 전능하시고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또한 존귀하신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그분의 보잘 것 없는 양자된 우리를 포함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부르도록 감동하셔야지만 여러분과 저는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어에서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호칭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정중한 표현인 “sie”와 더 일상적인 표현인 “du”입니다. 전통적으로 항상 더 격식 있는 “sie”로 사람을 불렀습니다. 격식 없이 사람을 부르는 것은 무례함의 극치로 간주되었습니다. 사실, 독일인들은 전통적으로 정중한 “sie”에서 격식 없는 “du”로 대화의 단계를 옮기는 데에 있어서 건배와 악수를 포함하는 일종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본연의 관계는 훨씬 더 형식적인 관계일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일부 독일인들이 기도할 때 훨씬 더 격식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훨씬 더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붙드시는 분인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단지 기쁨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국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게 받아야 할 것이니라.”

물론, 하나님의 “상속자들”도 아직은 온전한 유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유업을 온전히 주장할 수 있는 시기는 미래의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상속받을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새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유롭고 제한 없이 무한정 누릴 권한을 상속받을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상속자”가 아닙니다. 그 분은 지금 영광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시는 자신의 유업을 이미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게 고난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도 언젠가 그 동일한 유업에 참여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지위 때문에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관심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결국 이제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계시되었고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가족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2005년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부유한 가족 기업 중 하나가 상속 재산을 놓고 벌인 싸움이 국가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괴상한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이 그녀의 감사인에게 11억 달러 상당의 자산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회계사는 전체 재산을 상속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 가족의 회사 중 하나를 완전히 통제하는 라인에 있었고, 그 가족이 운영하는 다른 많은 사업 방식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나머지 유산의 가치가 약 90억 달러이므로 그 사람과 관련된 재산에는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은 가족의 명예가 달린 문제”라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그 유산과 그것이 기능하는 방식을 외부인과 무단 침입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십억 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더 가치 있는 기업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남겨두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믿을 수 없는 유산을 놓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매력적인 아들이시며 사실 그의 자연적 외아들이신 예수님과, 당신과 나처럼 “덜 매력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동등하게 대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놀라운 유산에 대한 우리의 몫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그 유업 가운데 우리 몫을 주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