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민권을 ‘고향’ 같은 것으로, 예를 들어, 미국 사람, 캐나다 사람, 지리적인 개념의 국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민권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의 태도와 행동의 일부를 형성합니다.
이번 주일 Lectionary가 지정하고 있는 서신서의 교훈은 국가적 시민권이 아니라 천국 시민권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그 시민권 역시 우리의 정체성 확립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시민권은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까?
흥미롭게도, 그리고 아마 어리둥절하게도, 바울은 천국 시민권이 그를 ‘본 받게 할’(빌립보서 3:17)뿐 아니라, 그의 생활 방식도 규정해 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 구절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주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본인이 다른 사람의 롤 모델이라고 주장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모방할 수 있습니다. Johan Sebastian Bach가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Dietrich Buxtehude의 연주를 매우 주의 깊게 보고 들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Bach가 Buxtehude의 교회를 여러 번 방문한 것이 그의 음악 스타일과 생명력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Buxtehude가 Bach에게 자신을 모방하라고 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본 받으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빌립보서 3:18)가 그의 독자들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이 Starter의 견해에 크게 도움을 준 Earl Palmer(The Lectionary Readings: Acts and the Epistles, Eerdmans, 2001, 363)는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반대하는 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 반대 쪽에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십자가의 적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들이 원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도록 허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Fred Craddock(Philippians, John Knox Press, 1985, 66)이 말한 것처럼 바울은 아마도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시작될 무렵에 빌립보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순전히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이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너무 영적인 존재여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으로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할 때, 그들 주변에 영지주의자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롤 모델로 삼을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바울은 몇 사람 안 되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의 여러 원수를 본받기보다 빌립보 사람들이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의 운명은 결국 부활이 아니라 멸망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에 있지 않고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었습니다.
21세기에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원수들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다른 원수들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신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쾌락주의자들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이 택하신 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형성합니다. 단순히 큰 소리로 그들을 비난하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위해 슬퍼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이 결과적으로 지옥으로 간다고 정죄하는 대신, 여러분과 나는 성령께서 그들을 천국 시민으로 만드시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갈망은 모든 사람이 천국 시민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결국 천국은 우리의 시민권 서류 뭉치를 보관하는 일종의 행정 당국입니다. 우리의 우선적인 충성심이 그곳에 있습니다. 물론 천국 시민권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들을 ‘그림의 떡을 말하고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형성하신 권리와 책임과 그에 따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 시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와 국가에 속한 시민이기도 합니다. 사실, 성경은 좋은 시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존경하도록 우리를 도전하십니다. 성경은 또한 천국 시민들이 우리에게 주신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이 땅에, 지금 이 시간과 이 장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상충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법을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선적인 가치, 헌신, 충성심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천국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정부에 대해 충성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고향, 진정한 통치자, 진정한 시민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Palmer가 위의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두 시민권은 어떤 면에서 서로 겹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천국의 선한 시민으로 산다면 우리는 이 땅의 시민으로서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무책임한 시민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도 무책임한 시민일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기독교와 미국 시민권이 완전히 중복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교적 자유로운 공화국 시민이었기 때문에 이 나라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미국 기독교인들은 미국과 미국 문화에 문제가 있음을 더욱 감지하게 되었고, 천국과 그 통치자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은 미국과 그 지도자들에 대한 충성심과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국가는 우리를 훌륭하고 품위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제자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성공하고 강력하게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종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돈, 성적 성취, 권력, 명예라는 신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와 이 세상, 심지어 당신과 내가 시민으로 살고 있는 이 나라와의 관계에 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충성심은 국가의 군사력 사용 및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대우와 같은 문제로 인해 충돌할 수 있습니다.
Will Willimon은 천국 시민이 되는 것보다 특정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지에 대해 역사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독일 교회는 천국 시민이 되기보다 나치 독일의 시민이 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로 인해 내키지 않지만 홀로코스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명확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저명한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독일 기독교인들은 나치가 유럽을 파괴하는 일에 과도하게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적어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백교회라고 부르는 교단의 일부 교인들은 히틀러를 보며 “안돼!”라고 말했습니다. 중대한 타협의 시기에 독일의 일부 용감한 기독교 시민들은 여전히 자신이 천국 시민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Karl Barth는 고백교회가 현실을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바르멘 선언”(The Barmen Declaration)을 작성했습니다.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인들이 히틀러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 우리가 들어야 하고 삶과 죽음 가운데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천국이 아닌 다른 영역의 시민이 되는 안락함을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오랫동안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과 같은 악을 묵인하거나 그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또한 북미 원주민이 대량 학살 당하는 동안 거의 침묵을 지켰습니다.
많은 목소리가 우리의 관심과 충성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경쟁해 왔으며 여전히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독일 기독교인이 그랬던 것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부와 권력, 명예를 찬양하고 군사력과 정치 권력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Lectionary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우리가 천국 시민임을 상기시켜 주는 서신의 교훈을 채택하는 이유 중 일부일 것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예배하기를 초대합니다. 천국 시민은 예수님처럼 정직하고 약속에 충실하며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공경하고,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며, 사랑의 공동체를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천국 시민들에 대한 세상의 적대감을 소름 끼치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현실을 볼 때 일어나는 일의 예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국가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보다 천국 시민권자의 요구에 더욱 순종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죄로 상처를 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데 온전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를지라도 ‘결승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을 압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우리를 자기와 닮은 온전한 천국 시민으로 다시 빚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양한 여권에 이르기 위해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여러분과 저는 때때로 이 세상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하기 위해 그것들을 봅니다. 그러나 예배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여권에 이르게 됩니다.
예배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와 헌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배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그리고 어떤 것에게 가장 충성스러운지 기억합니다. 예배 안에서 우리는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이 어떤 다른 모습으로 이 땅의 시민으로 살아갈 지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화 아이디어
한 미국인 목사가 방문했던 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가이드는 호텔 로비에 모여 있던 그룹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들은 미국 시민입니다. 당신들은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보호 받고 있다는 그 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이드가 그 뒤에 덧붙인 말에 더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신들은 법을 잘 지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미국 시민입니다.”라는 이 말이었습니다. 그 가이드는 그들의 미국 시민권이 그들의 정체성을 정의할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반응을 형성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자: Doug Br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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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17-4: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