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온전해지고 계십니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Carole Noren은 오늘 Lectionary가 지정한 본문에 대한 그의 수려한 설교(Pulpit Resource, October, November, December, 2002, p. 5)를 시작합니다. 적절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48에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 7:1에서 바울도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깨닫지만, 우리가 “온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사순절의 다섯 번째 주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가시는 온전함에 대해 성경적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영적으로 흠이 없는 유대인이었던 바울입니다. 제가 많이 빚지고 있는, Earl Palmer는 오늘 본문에 대한 그의 주석(The Lectionary Commentary: The Second Readings, Eerdmans, 2001, p. 358ff.)에서 말합니다. 자신의 영성을 확신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베냐민 지파의 높은 지위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도는 또한 신실한 바리새인이었고 모세의 율법을 충성스럽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속성과 자신을 비교해 보면 빌립보서 3장을 선포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부끄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몇몇 사람은 또한 하나님의 법을 매우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언행을 듣고 볼 때, 그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어떤 분이었을지 어느 정도 생각나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매우 철저하게 지켰던 바울조차도 어떤 종교적, 도덕적 자격도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그에게 보여 주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의는 율법 준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하나님은 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의와 비교하면서 바울은 이전에 그의 모든 업적을 문자 그대로 쓰레기나 거름인 “해”(7절)로 간주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율법 준수에 근거한 자신 안에 가지고 있었던 확신을 거부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율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바울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얻은 자기 자신의 의를 다시는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현대 교회는 여전히 인간의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찾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절이나 다른 선행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형제들 중 일부는 믿음을 일종의 새로운 “육체에 대한 신뢰”(4b)의 원천으로, 우리 자신의 새로운 의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탄의 끊임없는 압력 아래서 교회는 진리로부터 교묘하게 벗어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믿음으로부터 오는 확신이 이단의 한 예입니다. 믿음은 결국 기독교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받는 선물일 뿐이며 항상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관대한 선물로부터 오는 확신이 일종의 자기 만족을 낳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바울에게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율법주의도 결코 줄 수 없는 방식으로 그에게 큰 활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주를 준비하며 훈련하는 운동선수의 삶에 비유합니다.
Palmer는 두 종류의 인센티브가 운동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팀을 구성하려고 할 때 느끼는 압박감입니다. 선수들이 느끼는 또 다른 압박감은 팀 내에서 탁월해야 한다는 압박감입니다. 바울은 팀에 속하게 되는 동기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경주를 달리게 되는데, 어떻게든 하나님의 “팀”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우리가 그 팀에 이미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씁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이나 교만이나 두려움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거룩해지려고 애쓰는 동기가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받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인식만이 동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칭의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분의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자신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으로 반응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바울의 인간적 성공과 잘못된 종교적 열정을 잊게 한다고 Palmer는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받아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려는 그 목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롭게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키워 나가는 데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심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와지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온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두 번이나 12절에서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낙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다음 구절은 유쾌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분위기로 전환합니다. 그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주장합니다.
Palmer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바울의 인식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은 부적절하다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제안합니다. 빌립보서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 선교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를 탐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이 영적으로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를 의미한다는 점 또한 강조되기를 원합니다.
후에 바울은 “누구든지 우리 성숙한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15절)라고 주장합니다. “성숙한”이라는 말은 “온전한”이라는 말과 같은 어근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숙하다면 전에는 온전하지 않았었음 깨달을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바울이 말하고자 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신 온전함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Noren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온전함을 라틴어 의미로 흠이 없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하는 헬라어 온전함은 성숙과 충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이편에서는 흠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단어의 온전한 의미에서 온전하십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가운데서 성숙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합리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율법에 대해 요약하시면서 그러한 성숙함을 설명하십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문화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온전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거의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볼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문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자존감을 키우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다른 목표를 세우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에 완전히 자신을 열어 놓으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오직 성령만이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여러분과 저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적어도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려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기독교적 성숙함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과거에 대한 죄책감은 때때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의 임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리의 죄책감은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수고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일 Lectionary 본문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뒤에 있는 죄책감을 잊어버리라고 요청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지난 과거의 죄, 우리가 지난 과거에 했던 사랑의 실패가 우리를 마비시키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달려나가”도록(12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물리쳤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편집자 Tom Long과 Neal Plantinga는 A Chorus of Witnesses라는 제목의 설교집에 Paul Tillich의 “당신은 받아들여졌습니다(You Are Accepted)”라는 설교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들은 Tillich가 종종 그러하듯이 “기독교적 특정성으로부터 실존적 일반성으로 일반화”하더라도 은혜의 본질을 웅변적으로 잘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 설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읽을 것으로 예상되는 핵심 포인트에서 Tillich는 대신에 “당신보다 더 큰 분”을 말합니다. 그 결과 기독교 설교자들은 틸리히의 말들을 기독교화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절들은 여전히 웅변적이며, Long과 Plantinga가 “Tillich의 모든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라고 부르는 구절들입니다.
Tillich는 말하기를, 은혜는 “우리가 큰 고통과 초조함 속에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옵니다. . . 우리가 또 다른 삶이나, 우리가 사랑했던 삶이나, 혹은 우리로부터 멀어진 삶을 위반함으로 인해 우리의 이별이 평소보다 더 깊다고 느낄 때 은혜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 . . 해가 거듭될수록 갈망하던 삶의 온전함은 나타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낡은 강박이 우리 안에서 지배할 때, 절망이 모든 기쁨과 용기를 파괴할 때 은혜는 찾아옵니다.”
“때때로 그 순간 빛의 물결이 우리의 어둠을 깨고 들어옵니다. 마치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습니다. . . 당신보다 더 크신 분에 의해서, 당신 알지 못하던 이 이름 안에서 말입니다.’ 지금은 그 이름을 묻지 마십시오. 아마도 나중에 그 이름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많을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구하지 말고 아무 것도 행하지 마십시오. 어떤 것도 하려고 의도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 후에도 우리는 전보다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고 전보다 더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그 순간에 은혜는 죄를 정복하고 [그리고] 화해는 소외의 계곡 사이에 다리를 놓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는 아무 것도 요구 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지식적인 전제가 요구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받아들임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저자: Doug Br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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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4b-14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