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Lectionary는 다시 한 번 난해한 요한계시록을 다룹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매우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합니다.
1절은 요한이 이 서신서를 왜 기록했는지에 대한 말해줍니다: 속히 일어날 일들을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요한사도가 주목하는 일곱 교회들이 절실히 필요한 “계시” 입니다. 계시록의 정확한 연대는 다소 모호하지만 그 맥락은 더 명확해 보입니다. 로마 제국은 크리스챤 교회와 그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가이사는 로마 제국의 모든 시민들이 자신이 그들의 “주”임을 숭배하고 인정하기를 기대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했습니다. 가이사와 그의 로마는 그것을 반역으로 여겼기 때문에 초대교회를 철저하게 핍박했습니다.
때때로 피비린내 나는 박해에 직면하여 요한은 “곧 일어나야 할 일”을 드러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얘기하는 “곧 (soon)”은 다양한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연대순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이 기록되고 있는 그 시간의 요한과 그 당시 성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하나님은 복음이 인간의 삶과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또 그 삶과 역사가 어떻게 복음에 반응하는지 요한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요한과 당시 성도들의 세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계에서도 많은 강력한 힘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곧 일어나야 할 일”은 인간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신비한 이미지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요한은 곤경에 처한 성도들이 이러한 권세들을 구별하여 누가 궁극적인 능력과 권위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요한”(4a)이 정확히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세베대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으로 가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학자들은 그 요한이 이 계시록을 기록했다는 데 대해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시록을 설교할때 그 논쟁에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시록의 요한이 복음을 선포하다가 로마인들에 의해 밧모 섬으로 추방된 복음 선포자 또는 교사라는 점을 강조하면 될 것입니다.
이 요한은 오늘날 우리가 터키라고 부르는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4b) 를 위하여 계시록을 기록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요한이 그 교회들 중 적어도 일부의 목회자 였다고 제안합니다. 어떤 이들은 계시록을 일종의 신비한 암호로 취급하지만“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 하노니” 라는 지칭을 통해 계시록은 첫번째로 서신임을 상기시킵니다. 요한은 2-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하신 것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서신을 씁니다.
교회들에게 보낸 요한의 편지는 “계시”하거나 “공개”하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분명한 사실을 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계시록의 이미지들은 21세기 시민보다 1세기 독자들에게 더 익숙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아마도 구식 수동 전화기가 최근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신기하게 보이는 것처럼 계시록의 이미지들이 오늘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 주의 비교적 짧은 본문도 계시록의 신비로운 이미지의 한 면을 보여줍니다. 4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 “일곱 영들”을 대신하여 교회들에게 안부합니다. 일곱 영들에 대한 여러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계시록의 신비한 이미지 중 일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 이미지와 또 다른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N.T Wright (Revelation for Everyone, Westminster John Knox, 2011)는 그 계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예수는 그저 일세기 신화에 등장하는 동화적인 인물일 뿐입니다. 또 한편으로 오늘날의 열성적인 일부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는 사랑으로 가득 찬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입니다. 요한은 이 중 두 번째에 동의하지만, 예수님을 단순히 우리를 내심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분으로 상상하지 말라고 경고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해 주신 이 예수는 누구입니까? 부활절 이후 이번 주일에 이 본문을 설교하는 이들은 그가 5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의 맏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유대교 지도자들이 로마인들을 설득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예수는 죽은 채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최근 축하하고 기념했던 첫 번째 부활절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첫 번째 분이셨지만 마지막 분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 “맏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종말의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의 긴 가계에서 “맏아들” 일뿐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 입양 가족 중 죽음에서 부활한 첫 번째 멤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4b, 8절)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주석을 읽는 사람들처럼 20세기 중반에서 21세기 초반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과거에 늘 계셨거나 그가 측량된 시간의 시작에 있었던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의 영으로 지금 여기 계시는 것만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실제로 늘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은 그 메시지를 되풀이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현재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자니라.”
이 영원한 예수는 5b절에서 “땅의 임금들의 치리자”라고 요한은 덧붙입니다. 이것은 가이사와 그의 부하들에게는 전투적 단어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통치자와 그의 일행은 그가 신의 아들로서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가이사는 그의 로마 신하들에게 자신이 “땅의 왕들의 통치자”라고 확신시켰습니다.
로마의 가이사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영광과 권세”(6b)가 누구의 것인지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를 원했습니다. 로마만이 영광스럽고 강력했습니다.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로마가 자신의 절대적 권세를 모두에게 상기시키기위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군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참 아들이자 가이사까지도 다스리는 통치자라고 주장합니다. 그로 인해 로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던 방식으로 요한 (그리고 그의 설교와 가르침)을 땅 끝까지 추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유배된 설교자는 7절에서 영원한 왕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약속을 예정된 시간 끝에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새 땅과 하늘을 도래하실 것이라는 전망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부 학자들은 이 “오심”에서 “인자 같은 자”(단 7:13-14)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에 대한 암시를 듣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요한은 “인자 같은 분”이신 예수께서 이미 오셨고 실제로 매일 오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14절은 예수께서 그 인자이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일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일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계획과 목적에는 제 동료인 Stan Mast 목사가 이 본문에 대한 이전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계시록의 곤경에 처한 독자들에게 “은혜와 평화”(4b)를 주는 선물이 포함됩니다. 사실 그 은혜의 메시지는 교회들에게 보낸 요한의 편지의 시작과 끝에 나타납니다. 결국 그 편지의 “서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1).”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유배자 요한에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에 관한 것인 것 같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어떤 노래나 영화 또는 도서들 가운데 유명한 첫 대사나 시작하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첫 단어들를 인용해 봅니다. 예를 들어 C.S. Lewis의 The Voyage of the Dawn Treader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이름은 Eustace Clarence Scrubb이었고 그는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또는 Charles Dickens의 A Tale of Two Cities 는,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습니다.”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마지막 대사나 단어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 경우 유명한 마지막 단어들은 유명한 첫 번째 단어를반복하거나 떠 올리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첫 단어는 “은혜”(1:4)입니다. 그 마지막 단어 중에는 “은혜”(22:21)도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내가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는 시작과 끝입니다.
요한계시록 1:4-8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