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킵니다. 21세기 서구 문화는 종종 믿음을 객관적 근거가 없는 신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Merriam Webster Dictionary의 믿음에 대한 정의 중 하나는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신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토성은 블루 치즈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거나 내일 북반구에 눈이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믿음을 확신과 신뢰와 같은 것들과 연결시킵니다. 예를 들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실되다고 아는 참된 지식이며 또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것은 또한 … 나도 내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에게 영원히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다는 뿌리 깊은 확신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 문화와 기독교인들 모두 믿음을 주로 지적인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저자가 “믿음”을 언급할 때는 단순히 신념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저자는 구체적으로 그 정체를 밝히지 않은 어떤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권면의 말”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의 맥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익명성은 히브리서에 일종의 시대를 초월하는 특성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독자와 청중 각자가 성령에 의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히브리서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히브리적인 상징에 크게 의존합니다. 안식일, 대제사장, 성막과 같은 개념뿐만 아니라 모세와 멜기세덱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친숙함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다른 종교나 그들의 관습보다 훨씬 더 잘 보여 주고 계십니다. 사실 모세와 멜기세덱, 안식일, 대제사장, 성막 모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히브리서는 주장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핵심 주제 중에는 “믿음”과 “찬사”가 있습니다. 사실 11장 시작(2절)과 끝(39절)에서 각각의 개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신실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히 아브라함에게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오늘 Lectionary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구절들을 오늘 본문으로 지정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 구절들에서 히브리서를 작성한 영감받은 저자는 아브라함의 찬사 받을만한 믿음을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네 가지 행동을 언급합니다(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반면 히브리서는 흥미롭게도 그 족장을 “아브라함”으로만 언급합니다). 첫째, 8절은 아브라함에게 메소포타미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순종적함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GPS 없이도, 비록 그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였을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업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신 곳을 향해 출발합니다. 아브라함은 불안전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삶을 위해 안전하고 안정된 삶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이번 주 Lectionary 본문을 설교할 때에 청중들에게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하려고 했는지를 질문하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둘째, 9-10절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지내고 있을 때를 묘사합니다. 그가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 때 그들은 시민권이 없는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불법자들”이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 곳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천막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야할 땅에 대한 토지문서도 없이 약속의 땅을 향해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그가 사는 땅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얻지 못한체 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아브라함을 준비시켰던 그 믿음이 무엇인지 탐구해 본다면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셋째, 11-12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자녀 한 명 얻지 못한체 거의 25년 동안 가나안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이를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가족의 영구한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꼭 필요했던 아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역경 앞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고집스럽게 붙드는 믿음은 무슨 믿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1절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한 구절이지만 그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헬라어인 “휘포스타시스”와 “엘렌코스”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물론 NIV 성경은 그 단어들을 “믿음”과 “확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들의 의미는 훨씬 더 풍성합니다. “휘포스타시스”는 우리 믿음의 객관적인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엘렌코스”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객관적인 확실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그러한 실체와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Robert Gagnon이 제안한 것처럼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궁극적인 실체가 우리가 지금 듣고 보는 어떤 것 안에 있지 않다고 믿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믿음이란, 궁극적 실체라는 것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라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어도 서구 문화에서 신앙을 급진적인 개념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어쨋든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고 믿습니다. 어떤 방식을 사용해서라도 측정이나 테스트가 불가능한 것은 실제로는 실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히브리서는 진짜 실체인 것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예를 들어, 비록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아직 그 보상을 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분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 주위에 창조 역사를 기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내용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그처럼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더 나은 집을 예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르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영구한 집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후손들에게 그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나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을 그들에게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임신이 불가능한 아내와 (대체로) 신실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측량하고,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더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실상을 믿는 것이며,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것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그러한 믿음을 결코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 변증학만으로는 하나님은 신뢰하실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신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는 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받는 많은 자녀들이 이번 주일에 모여 함께 나눌 예정인 성찬식에서 단지 떡과 잔과 주스만을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성찬의 요소가 우리가 즐거이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또한 주의 만찬에 올 때에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만을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기도하고,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그 곳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대우받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돌보도록 우리를 우리가 있는 이 곳으로부터 파송합니다.
이번 주일에 히브리서 11장에 대한 선포가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청중들과 우리 모두가 그러한 믿음으로 충만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아이디어
그의 책 Beyond Words: Daily Readings in ABC’s of Faith에서 Frederick Beuchner는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 씁니다. 하나님은 100세의 아브라함과 90세의 사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들의 이름으로 히브리어로 “웃음”을 의미하는 “이삭”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두 노인들은 왜 웃었을까요? 한 발을 무덤에 들여 놓고 있는 여인이 곧 다른 발로는 산부인과 병동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떻게든 그 말씀을 믿기를 기대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웃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믿으시는 것같이 보이셔서 웃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반신반의 했기 때문에 웃었습니다.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기분이 더 낫기 때문에 웃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그 일이 현실이 된다면 정말로 웃을 일이 생길 것이고, 그 동안 그 말씀이 그들이 계속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웃었습니다.’
히브리서 11:1-3, 8-16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