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이 왜 Lectionary에 따른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 설교 본문으로 선택되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본문이 예수님의 평지 설교(누가복음 6:17~26; 아울러 시편 1편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처럼 ‘축복과 저주’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이 본문 안에는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찾아내고 이해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영광이라면 모를까,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어떠한 계시도 없습니다.
각기 다른 이 장의 여러 내용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라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예레미야서의 흐름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장은 예언자적인 비난(1-4, 11절), 개인적인 신앙 고백(12-18절), 안식일 준수에 대한 설교(19-27절),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집중하는 일부의 지혜문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반복되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1, 5, 9,10절). 그래서 나는 이 본문의 설교제목을 “마음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길가는 여성 아무나 붙잡고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해 묻는다면, 그녀는 아마 “지구 온난화, 인종차별과 증오, 소득 불균형, 이슬람의 테러리즘, 국제분쟁”이라고 답하거나, 대중 매체의 헤드라인 점하고 있는 여러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사람의 마음이 이 모든 문제들의 핵심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의 마음을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 장을 시작하면서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이사야서 6:9-13 말씀을 통해 들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하게 책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강퍅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죄가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9절)하다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거짓”이라는 이 단어는 흥미롭게도 ‘속이는 자’, ‘음모가’, 자기 뜻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기꾼’을 뜻하는 야곱의 이름과 같은 히브리어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고, 어떻게든 속이려고 합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하고 교정할 수 없게 합니다. 마음은 지나치게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자기 주변을 맴돌기 때문에 사실상 미쳐있습니다. ‘미쳤다’를 의미하는 오래된 손짓이 손가락으로 귀 주변에 원을 그린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인간의 그 미친 마음을 뚫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 마음의 주인인 그 사람마저도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속이고, 고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인간의 모든 죄와 비극의 뿌리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저주를 받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예레미야는 아주 간단명료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저주 받은 사람과 복 받은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고, 그 차이는 누구를 믿느냐에 있습니다. 수많은 차이점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차이점들에 의해 나뉘어져 있는 이 세상에서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며 계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현절’일지도 모릅니다. 흑인인지 백인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무슬림인지 이교도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동성애자인 이성애자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가 궁극적으로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저주 받은 자를 물 없는 사막의 떨기나무로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생존의 끝자락에 서있고, 항상 물이 부족하며, 죽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어 가끔씩 폭풍우의 형태로 물이 공급되더라도 “번영”이나 풍요 또는 풍족함의 상태엔 이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어도 해도 겨우겨우 생존하는 정도입니다. 그의 인생은 몹시 목마르고, 외롭고, 그 삶의 중심에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전, 소망, 힘, 의로움에 의해 복을 받습니다. 예레미야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가에 심긴 나무에 빗대어 복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 나무의 뿌리가 “생수의 근원”(13절)에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 나무는 항상 푸르고 계속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두려움이나 걱정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마음 가운데 믿는 그 사람의 인생은 풍요롭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이런 분석이 갖는 문제는, 이러한 분석이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일부 청중은 복잡한 인류를 이렇게 단순하게 나누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 모릅니다. 인류에게는 ‘누구를 믿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정말로 이렇게 간단합니다. 정치적 옳음이 아니라 인생의 진리 면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세상을 나누는 가장 큰 차이입니다.
또 다른 일부 청중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항상 복을 받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하나도 안 생기고 하나님 대신 사람의 의지나 지식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나쁜 일만 생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악한 자들이 번영할 때 정작 의로운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는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씨름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라도,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문제를 겪는 경우들을 볼 수 있고, 당신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더위와 가뭄이 닥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요한복음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을 당할 때에도 번영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두려움이 찾아오고 불안이 계속될 수 있지만 풍성한 삶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심을 다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존, 독립, 자율, 자랑하는 마음은 자기 우상화가 될 수 있으며, 결국에는 저주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 너머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지 지켜보십니다.
깡패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폭행을 일삼는 술주정뱅이고, 폭력배들과 더불어 이웃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마약을 팔고,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고 있는데 “그래도 마음은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반대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마음이 어두운 사람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자주 듣던 킹크스(Kinks)라는 그룹의 “A Well-Respected Man”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대충 이렇습니다. “그는 참 착하고, 몸과 마음이 참 건강하다. 그는 동네에서 존경받는 사람이고, 보수적으로 모든 행실에 뛰어나다. 하지만, 그는 욕심이 많고 정욕이 가득해서 아버지의 재산과 옆집 여자를 얼른 갖고 싶어 안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숙이 들여다 보고 계시며 그 마음이 드러내는 삶의 행위들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드러내는 그 행위대로 각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음이 누구를 믿느냐가 여전히 중요한데, 마음이 누구를 믿는 지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우리의 행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한 생각이지만, 이것이 성경이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0)
이 교리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행위에는 그에 따른 책임이 있고, 그 누구도 나쁜 행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 따위는 없어”라고 말하며 살아왔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존재하고 있으며, 끝날에 모든 악에 대한 정산은 정확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임수나 자기합리화를 훤히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합당한 상급을 받을 것을 기뻐하십시오.
기억해야 할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도 예외는 아닙니다. 나에게도 거짓과 심히 부패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어떠한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까? 이 본문 안에 복음이 있습니까? 복 있는 사람과 저주 받은 사람의 차이가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믿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 그리고 그들의 동맹을 믿었을 때 그들은 광야의 떨기나무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8절에 나오는 “심긴”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그 분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부정한 마음으로 저지른 나쁜 행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정의가 요구하는 것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쁜 행실을 그냥 잊어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 대신 심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25-26)
예화 아이디어
최근 몇 년에 동안 미국에서 수많은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중 한 건을 세세하게 기억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17장을 보는 동안 콜로라도 주의 오로라 시(Aurora, Colorado)에서 일어난 극장 총기 난사 사고에 대한 검사의 단호한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한 미친 사람이 자신의 반자동 소총으로 극장에 온 사람들을 하나씩 쏘아서 죽였고, 그 살인자는 자신을 정신이상자라고 변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검사는 그의 변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범죄가 너무나도 끔찍한 두려움을 동반했기 때문입니다. 검사의 주장이 신문의 머리 기사를 장식했는데, 그 말이 예레미야서와 로마서 3장 말씀 비슷하게 들렸습니다. 그 검사는 “정의는 죽음을 요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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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1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