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1-11 주석

이번 주일 Lectionary 서신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부활 신학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부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는, 바울이 이미 언급했던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부활에 대해 명확하지 못한 이해는, 예를 들어, 그 당시 고린도 교회를 물들이고 있던 성적인 문제나,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는 문제나, 법정에 호소하는 문제들에 대한 오해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아니, 부활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의 한 끝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는 1장과 2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서술함으로 시작하고, 이제 여기서 부활에 대해 논의함으로 실제적으로는 끝을 맺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과 15장을 굳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전1:17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복음”의 중심이라고 논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은 “복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소식임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선포합니다.” 15장에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선포했던”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고전 1:28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가져오셨다고 말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한 쪽이 없다면 바울에게는 그 두 가지 사건은 모두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믿음과 영생 전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옥으로 가는 일방통행로에 자신을 내려 놓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용서를 영원히 누리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 영생을 누린다는 보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몇 가지 점들을 아주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 가운데 “선 것”과,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소망을 예수님의 부활 위에 두었던 것을 바울은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습니다(1절).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바울이 가르친 것을 단단히 붙들고 “굳게 지키면,” 부활의 좋은 소식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2절).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산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인 우리가 눈이 내리는 그 인생의 산을 오를 때 우리의 귀한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힘껏 붙들어야 하는 견인 줄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만일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부활의 견인 줄을 잡던 손을 놓아버리면, 결국 가파른 산 아래로 굴러떨어질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급박한 호소를 하는 것을 보면, 이미 고린도 교회 중 몇몇 사람들이 그리스도 부활 복음의 견인 줄을 놓아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부르신 그 믿음을 잃어버린 채 지내온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집을 그 집의 반석인 부활로부터 떼어내어 모래 위에 세우려는 위험을 자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흔들리는 고린도 교회 형제들을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들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울로부터 시작 된 신화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행하신 일에 대한 증언이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따라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전체를 움직여 나가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고린도 전서 15장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부활에서 마무리 하는 방식으로 복음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3절 이후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오늘 나타났다가 내일이면 잊히는 뉴욕 타임즈 신문의 헤드라인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우리의 기억이 지속되는 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바울이 “먼저 받은 것”(3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사실 우리가 사는 한 매일매일 기억해야만 하는 우리 인생 전체의 헤드라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바울은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 목격자들의 상상속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님을 거듭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후,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들의 리스트를 바울은 나열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덧 붙여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던 그들 중 몇몇은 “지금까지 살아있”(6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고린도 교회 중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어떤 식으로든 의심한다면, 그들은 그 살아 있는 증인들 중 한 사람을 만나 확인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후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활을 설명하는 어떤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감사한 마음으로 따랐던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자매들 안에도 믿음을 일깨워 주시도록 자신들을 은혜로 사용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의 진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진술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또 다른 믿음의 진술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일들 역시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실 바울도 교회의 진술 위에 자신의 진술을 더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의 진술을 6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6절-8절).” 

그 당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걸쳐 믿는 자들의 지경을 확장하고 계셨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꽤 적은 선택된 증인들의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나타나서 보여주신 마지막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큰 사명이 있다고 바울이 생각한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일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열두 제자 중에 속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비록 첫 번째 부활 주일 아침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기쁨으로 바꾸셨기는 했지만, 부활 이전의 그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첫 번째 오순절 날에 내려 오셔서 충만하게 하셨던 일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바울은 사실 초기에는 교회를 실제로 박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증인이었으며, 그 순교를 승인했던 사람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가던 도중에 그제서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8절), 즉 문자적으로는 유산된 태아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근본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의 메시지를 선포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바울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바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도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최선을 다하여 선포할 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그 복음 선포가 우리 본문을 규정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녀들의 삶에 대한 아젠다를 제시합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그가 그들에게 “선포한”(1절) “복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오늘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 복음을 “선포”(11절)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복음 선포를 사용하셔서 은혜로 많은 다른 사람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15장 나머지 부분에서 바울은 그렇게 위대한 복음이 품고 있는 의미를 펼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복음 선포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헛된 일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야 말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한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선포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 모두가 친구들과 이웃들과 직장 동료들과 세상에 전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부활의 복음입니다. 엄청난 절망으로 점철된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바로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우리 이웃들과 자연 만물과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가 만들어버린 엉망이 된 상황 뿐 아니라, 세상 만물 전체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언젠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충격적인 이야기인, ‘좋은 사람은 드물다(A Good Man Is Hard to Find)’에서 Flannery O’Connor는, 이제 막 한 할머니를 죽이려 하고 있는 마음에 가책을 느끼는 살인자인 ‘부적응자’ (the misfit) 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부활이 모든 것을 바꾼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사실, 그는 부활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은 자를 일으킨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부적응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잘못이에요. 그 사람이 모든 것을 흔들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 말대로 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버리고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밖에 할 게 없죠. 그런데 그 사람이 안 그러면 우리는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힘껏 즐기는 수밖에 없어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다른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나쁜 짓만큼 재미난 게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거의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pp. 182f. ‘좋은 사람은 드물다,’ ‘세계문학단편선12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현대문학,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