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1-14 주석

우리 가족과 내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워싱턴 D.C. 지역으로 처음 이사했을 때 현명한 내 동료는 나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했고, 그 지역에 있는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책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뭔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 교인들의 지적 갈망은 그들과 함께하는 또는 그들을 위한 내 사역을 매우 즐겁게 만드는 많은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하시는 일을 생각할 때 지식은 더 이상 나의 가장 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항상 그들을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너무 똑똑하거나 현명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라는 비옥한 땅에서 자라난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분노와 거짓말을 온유와 용서로 바꾸고 계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은 인종과 배경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을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시는 것을 받는 신앙과 더불어, 복음으로부터 자라납니다. 복음은 결국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일련의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통한 능력입니다.  본문 6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열매를 맺고 자라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양자된 자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실천하는 새 피조물을 만들어 냅니다.

바울은 아마도 본문에 나오는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교회를 개척한 그의 동료 에바브라로부터 그들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들은 그것이 바울의 기도를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골로새인들에게 계속 편지를 써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골로새서 1장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청중들의 소망으로부터 견고하게 자라나고 있는 믿음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교회와 이웃과 직장 및 지역 사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방식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9절에 나오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너희를 채우게 하시고..”라는 말은 적어도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놀라운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미 가솔린으로 가득 찬 가스 탱크를 계속 채울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적어도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충만하고, 사랑이 많으며,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아직 완전히 지혜롭거나 이해력이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전히​​더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것을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그들에게 채워 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영적 지혜와 이해력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양자 된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기를 서두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기 전에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오순절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다양한 언어로 담대하게 복음을 말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준비시키신 것을 축하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주장했는지 기억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예언하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 자매들에게 성령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도구들을 설명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과 영적인 지혜와 총명을 은혜롭게 채워주십니다.

여기에 바울이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에 대한 첫 번째 암시가 있습니다.  이단이 그들의 젊은 교회에 깊이 뿌리 내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거짓 교리를 반증함으로써 그 뿌리를 파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과 영적인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울이 10절에서 “주께 합당한 삶”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며, 인내하고, 오래 참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과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채우시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경건한 말과 행동 안에서 자라나는 한 가지 열쇠는 지식이지만, 그 지식은 아무 지식에서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자라납니다.

그것이 바로 아마도 우리 그리스도인 조상들이 우리보다 더 잘 이해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교리와 신학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인 조상들은 때때로 사상과 교리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이 가능하게 하시는 사랑을 등한시하는 일종의 지적인 기독교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강조점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경험과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식이 아니라 영성을 통해 성장한다고 가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일의 Lectionary 서신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양자 된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주시는 참된 지식에 중심을 두고 있는 일종의 중도로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그 필수적인 지식 중 일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우리가 “어둠의 권세”에서 구출된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신실한 관계를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가 스스로 사탄과 그의 동맹자 곧,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받는 자녀들을 자유롭게 하셔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시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자 된 자녀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성찬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찬양과 찬송을 배우고 부릅니다. 우리는 C. 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와 Augustine의 참회록과 같은 기독교 고전을 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조들과 신앙고백들을 배우고 암송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을 완성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성경 퀴즈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확장하여 우리가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지식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어떻게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창조된 모든 것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창조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서로를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몸이나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온갖 맛있는 “열매”를 맺는다고 주장합니다. 그 열매는 바로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며, 모든 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고, 오래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영적 지혜와 이해가 주로 감사를 낳는다고 제안하면서  이번 주일에 Lectionary가 지정한 본문을 끝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많이 배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에 대해 더 온전히 감사하게 됩니다.

사실, 그는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단지 한 번이 아니라, 감사가 이 편지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일 정도로 그렇게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 보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우리의 삶에서 계속 하시는 위대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보기를 갈망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Garrison Keillor가 한 번은 어떤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한 특권 의식 때문에 그 충고를 쉽게 용납하지 못하고 주저하곤 합니다.

“Family Guys”라는 TV 쇼의 제작자 Seth McFarlane가 9월 11일 Boston에서 LA로 가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의 좌석을 예약했습니다. 그러나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그는 그 비행기를 놓쳤고, 그 비행기는 납치범들에 의해 탈취되어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로 날아갔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남은 인생을 선물로 생각하게 했는지 물었고, 그는 그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경험이 저를 전혀 바꾸지 않았습니다. 내 삶의 방식은 여전했고, 내가 사물을 보는 방식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냥 우연일 뿐이었습니다. ”

Lew Smedes는 20:1 밖에 안 되는 확률로 폐에 혈전이 튀는 일을 겪고도 살아남았습니다. 의사가 그를 축하했을 때 그는 특별하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부분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Lew Smedes는 자신이 “폭풍 감사”에 사로잡혔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팔은 저절로 꼿꼿이 올라갔습니다. 100 파운드나 되는 무게의 힘으로도 내 옆구리에서 그 두 팔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손을 벌리고, 손가락을 뻗고, 흔들고, 비틀면서, 지금 이 좋은 몸으로 이 좋은 땅에 살아 있다는 것의 견딜 수 없는 선함에 대해 주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