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8b-13 주석

오늘 본문은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주일에 선포하기에는 독특한 본문 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통상 사순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두 절기인 성금요일과 부활절을 준비하는 회개의 기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0장은 부정의 방법으로만 그러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사순절에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은 주님입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마음으로 믿지 않는다면”(10절), 당신은 그런 잘못에 대해 회개해야 만 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10:8b-13을 전할 때, 사순절을, 자신 안에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영적 만족감을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우리 자신이나 청중들을 초대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어떨까요? 혹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심히 사랑하시는 세상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일들을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에 대해,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도록 부르는 일에 이 구절을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접근들은 오늘 Lectionary가 말하고 있는 서신서 본문의 문학적 신학적 맥락에 잘 들어 맞습니다. 넓게 말하면, 바울은 9장에서 11장까지의 대부분을, 바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받게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실패했다는 점에 대해서 바울이 근심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9:31ff에서 이렇게 슬퍼합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복잡한 논점들을 요약하면, 이스라엘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하나님의 율법을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들을 의지했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만이 그 큰 “배”에 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물론 압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본성으로 자발적으로 “그 동일한 배”에 기어올라 탑승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생명과 죽음과 부활에 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우리의 복종에 있다고 가정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잘못을 고백하지 않은 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충분히 “의로와지는” 일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일입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Fleming Rutledge가 말하듯이, “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다른 사람들의 ‘의’에 대하여 겉으로든 속으로든 판단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 우리가 성경 언어를 버렸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아주 희미하게라도, 선에 대한 기준을 저 밖 어디엔가 가지고 있다” (“Preaching without Distinction,” in Not Ashamed of the Gospel, Eerdmans: 2007, p. 307-8).

하나님과 우리 이웃들과 우리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의로와”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우리 모두는 늘 자연스럽게 선한 도덕적 사람들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신이나 사회나 심지어 우리 자신들로부터 정죄 받을 위험에 놓이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0장의 이 내용을 선포할 때 우리는 청중들의 그런 두려움들을 잘 살펴보아야 하며, 본문 문맥에 잘 맞는 예들을 사용하는 것도 아마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의롭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들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가 기껏해야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의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대를 만족시켜 드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의는 사회의 기대나 우리 자신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고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의존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분은 오직 한 분, 오직 한 “주님”(10절)만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뛰어 넘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온전한 의지를 확증하기 위해서 10절에서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네가 너를 의롭게 하는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가 의로와지는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바울 사도는, “네가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의 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네가 구원 받는 것은 네 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광범위하게 수동태를 사용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롭게 하거나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것은,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의롭게 하거나 구원하실 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런 분이 이미 있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전체 뿐만 아니라, 10장 앞 부분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을 보면 우리에게는 한 가지 결론만이 남아 있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 하거나 구원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덧붙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구원을 은혜로 베푸신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방인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바울은 여전히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바울은, 우리의 죄로 물든 머리와 강퍅한 마음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그 복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지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그리스도인라면 이러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특별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고발한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 아닙니까? 그들은 광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를 잊었던 걸까요? 그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같은 오직 ‘내부자들’만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러한 그들의 종교적 “지협성”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실망시켰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인색한 내 자신의 성향 역시, 그들 못지 않게 예수님을 실망시키고 슬프게 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로 나를 이끄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성령을 은혜로 주셨으므로, 사실 하나님께서 예수님 당시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절망하셨던 것 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내 자신의 인색함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더욱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10장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과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편협함 사이를 대조하면서 그 깊이가 얼마나 다른지 따져볼 시간을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에 더하셨으리라고 생각되는 몇몇 경고들을 탐구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덧붙인 다양한 꼬리표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일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2015년 3월 13일 판 Public Discourse에 실린 “오히려 율법폐기론적인 기독교: John Updike의 종교”에서 Gerald R. McDermott는 Updike를 ‘많은 모순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또한 연속적으로 간음을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국의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 받아왔지만, 그의 저작은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세련된 포르노라고 폄훼 되었습니다. 그러한 성 혁명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파멸을 가져 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정부(情婦)와 결혼하기 위하여 자신의 첫 번째 부인과 자녀들을 버렸습니다.

[작가인] Daniel Ross Goodman이 지적했듯이, Updike는 완고하리만치 평생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종교적인 작가입니다 … 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아내에 대한, 도덕성과 종교에 대한] 갈망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늦은 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면 자녀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버드 재학 시절부터 그의 생의 마지막까지 60년 이상 그는 기독교 유신론을 변호했습니다. 심지어 ‘커플들(Couples)’이라는 그의 책은 종교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부정(不貞)에 그렇게 열정적일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대답은 그의 종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종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안락을 구하는, 전통적인 신앙이 가지는 엄격한 제한들을 거부하는 이상한 종류의 기독교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율법 없는 복음, 회개 없는 은혜, 하나님의 거룩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Updike가 부분적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적 유물론이 감정과 양심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첫 번 째 부인의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를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했습니다 …

‘그런데 Updike의 종교에서는, 실재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의무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 없습니다. “종교는, 그 원수들이 말하듯이, 실재하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성별하는 운명론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의무는 삶이 제시하는 위대한 선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Updike는 Barth로부터 다음 생은 단지 이 생을 회상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루터파로부터는,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지켜야 할 율법은 없다는 “오히려 율법폐기론적인 기독교”를 배웠다고 그는 쓰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 소심해서 그것들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습니다. 회개하거나 우리 스스로를 개선해야 한다는 긴박함도 전혀 없습니다. Begley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원죄는 불가피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뛰고 있는 경기를 개선하고자 연합해서 하는 어떤 노력도 구원 받고자하는 의로운 투쟁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Updike가 Barth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잘못된 방향이며 헛되다는 것입니다. 한 비평가는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Updike는 기독교 신학을 기독교 윤리로부터 “급진적으로 결별시켰습니다.”’

저자: Doug Bra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