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첫 부활절 아침에 천사는 두 명의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말했습니다. 200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연로한 사도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또한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사실을 믿기가 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어떻게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신다는 말을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믿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1절)? 결국 그리스도께서 먼저 재림하지 않으시면 가장 거룩한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는 영적으로라도 살아 있다고 항상 느끼는 것도 어렵습니다. 당신과 나는 때때로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지만 영적 나른함을 느낍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의 대부분이 세례를 준비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종의 교리문답이라고 제안합니다. 그 안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살리신 사람들에게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초대 교회는 주로 부활절 아침에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을 읽는 21세기 독자들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세례 받은 지 하루도 안 된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어 준다고 상상하려고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청중 중 일부가 비유적으로라도 물에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할지도 모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한 세례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의 초점은 세례를 통하여 공유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신 로마 교인들에게 “새 생명을 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는 우리를 “살리심을 받은 자”라고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살리신 사람들은 언젠가는 영광 중에 그분과 함께 나타날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동전의 양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죄 많은 옛 자아를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 묻지만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순종의 새 삶으로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아마도 덥고 졸린 주일에(적어도 북반구에서) 오늘 본문은 화성에서 살기 위한 지침만큼이나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성령께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최소한 몇 가지 의미들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할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땅에 묻으시고 다시 살리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죽음으로 삼으셨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위의 것을 생각”(1b절)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더 높은 정신적 경지에 이르는 일종의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높은 경지에로의 부름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마치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과 분리시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속담에서 이르듯이, 바울이 “땅에 있는 선”에 속하지 않은 “하늘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대한 생각으로 너무 바빠서 이 땅에 벌어지는 일들에는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2장을 읽어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러한 단절에 대해 저항하도록 요청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거기에서 결국 그는 “교묘한 말”(골2:4)과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2:8)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번 주 본문에서 위의 것들에 마음을 두도록 독자들과 청중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이 예수님의 부활과 일치해야 함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우리의 삶을 “감추”셨습니다(3절). 그 말은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생각인 반면, 적어도 충만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을 선포하고 듣는 자들 모두를 하나님의 유일한 “타고난” 아들이신 예수님을 다루시듯 여기시고 대우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 생명이 감추어진 사람들에게도 이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책임 있는 자녀로 살 수 있도록 자유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성령께서 그들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의 죄악된 삶의 방식을 죽이시고 신실한 순종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 우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죽은 후에 우리 앞에 있는 영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그 분 자신과 생명과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장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이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도록 준비시켜 주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설교 주석에 대해 많은 아이디어를 빚지고 있는 Leonard Kline이 지적하고 있듯이, 때때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극적인 방식으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활 생명을 돈이나 가족이나 우정과 같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일과 성생활 및 우리의 태도와 같은 핵심적인 내용들과 관련하여 위의 것들을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정치와 남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은 견해를 갖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사랑과 친절과 신실함과 자제력과 같은 미덕을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물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재정비하시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사람들도 결국 자연적으로는 자신이 선택하고 통제하려는 완전한 독립, 부, 행복과 같은 그릇된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Lectionary의 이번 주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심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몸과 영혼까지도,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망들을 하나님께서 갈망하는 것 위에 놓으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갈망하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은혜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비를 갈망하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잘못된 욕망은 믿음과 활력, 아름다움과 선함을 사망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위의 것들을 향하도록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죽이시고 새로운 순종의 삶으로 일으키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것을 갈망하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예화 아이디어
Dead Man Walking이라는 영화에서, 바울이 골로새서 3장에서 말한 새로운 생명과 유사한 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영화는 Matthew Poncelot의 사형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Poncelot은 법원으로부터 살인 혐의에 대해 정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씁쓸하고 완고하며 냉소적인 범죄자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시간들이 다 되어갈 때, Helen Prejean 수녀는 그의 영적 조언자가 되기로 자원합니다. 그녀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Poncelot에게 사랑의 얼굴을 보여주고 그가 죽기 전에 진정한 회개를 하도록 돕고 싶어합니다.
결국 이 사형수는 Prejean 수녀에게 자신이 성경을 읽고 있다고 알립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서 그는 처형된 후에 예수께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그는 그 수녀에게 말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신학적으로 견고한 것이었지만, Prejean 수녀는 이에 대해 무언가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게 그렇지 않아요. Matthew.” 그녀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미는 티켓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구속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Prejean 수녀가 Matthew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 충격을 받은 것처럼 반응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수녀 말은 마치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중 몇몇 사람들은 Prejean 수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Matthew Poncelot는 처음에는 “위의 것”에 그의 마음을 “두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비참한 육신을 구하고 (또는 최소한 위로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Prejean 수녀는 Poncelot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구원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부활절 직후에 (그리고 강력하게) 그녀는 그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인정하라고 도전합니다. Prejean 수녀는 Matthew에게 하나님께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인 젊은이들의 부모에게도 회개하라고 권유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살인자가 바로 그렇게 하도록 준비시키십니다. Poncelot은 마침내 그가 젊은 여성을 폭행하고 그녀의 젊은 친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십자가에서처럼, 당국이 그의 팔에 연결된 독이 든 수액병이 달린 들것에 그를 묶을 때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는 희생자의 부모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Poncelot은 독극물이 주입 되는 자신의 사형을 기다리면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깊은 회한을 표현합니다.
Poncelot는 어떤 의미에서 그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이나 알리바이를 제공하려 하지 않습니다. Matthew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되서야 하나님을 단지 기적을 일으키시는 조력자로 대하는 일을 멈춥니다. 그는 대신에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리시는 사랑 많은 아버지로 대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Matthew Poncelot은 본질적으로 위에 있는 것들에 그의 마음을 두었습니다. 마침내 여러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사고 방식으로 그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Matthew Poncelot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생 동안 의도하셨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된 옛 자아를 묻으시고 Matthew의 연약하고 종종 이기적인 믿음을 살리셨음을 보여줍니다.
무덤 바로 이쪽에서 하나님께서는 Poncelot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감싸셔서,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십니다. 결과적으로 Poncelot이 사형 집행의 반대편에서 누구와 함께 영원을 보낼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골로새서 3:1-1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