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H라는 TV 시리즈의 초기 에피소드 중 하나에 보면, ‘사냥꾼’(Trapper)으로 알려진 한 의사가 위궤양 진단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가 그 문제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의 2층 침대 친구인 Hawkeye가 육군 규정에 따라 그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짜증과 화는 곧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의 위궤양이 그를 한국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입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Trapper를 위한 송별회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Trapper가 파티에 나타나기 몇 분 전, 중대 서기인 Radar가 최근에 육군 규정이 바뀌어, 그가 한국에서 치료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어찌 됐든 Trapper는 파티에 참석했고, 그 저녁의 유쾌함과 축제와 즐거움이 오랫동안 계속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한 마디를 하도록 요청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한국에 남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파티가 진행 되는 동안 Trapper와 Radar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에서 진실이 거부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들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면 충분히 알아차렸을 겁니다. Trapper가 파티 내내 미소를 짓고 심지어 웃기도 했지만, 그 웃음은 억지였고,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파티였지만, 그가 희망했던 결과나 파티 참석자들이 예상한 결말은 없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눈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일전에 누가복음 19장 설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누가복음 안에서의 종려주일은 몇 가지 어두운 사건들에 둘려 있습니다. 누가복음 19:26-27 안에 나오는 불길한 말들과 누가복음 19:41-44 안에서의 예수님께서 우셨던 모습이 그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승리의 입성의 작은 행진이 계속되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 그의 눈은 진실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는 칭송을 받으며 웃고 계셨지만, 그러나 그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던 것 아닐까요?
Lectionary에서 여러분은 “종려주일 예전”(Liturgy of the Palms)이나 “수난주간 예전”(Liturgy of the Passion) 본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본문은 “종려주일 예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누가복음 19장에 종려나무 가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호산나”도 없고 어린이도 없습니다(예수님이 다가오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어린이들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가장 단순하고 가장 좋은” 찬양을 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행복한 언급 또는 “달콤한 호산나 반지를 만들었습니다”라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 목회자들은 “Hosannas Loud Hosannas”라는 찬양에 맞추어 종려나무 잎을 나눠주는 모든 어린이 합창단 지휘자를 꾸짖고 나무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물론 누가복음 19장의 요점이 선의의 합창을 화나게 하거나 모든 사람의 종려주일의 경박함을 짓밟는 데 있지 않습니다. 누가는 우리가 예수님께만 분명히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합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곳이 누가가 말하려는 진실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저는 Pennyroyal Caxton Bible에 나오는 Barry Moser의 종려주일 묘사를 좋아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심지어 그의 나귀에게도 어둠과 침울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와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계셨고,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것은 그 일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일을 위해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군중이 노래하고 있는 바로 그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또한 그가 평화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도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종려주일”을 사순절 기간 중 그래도 밝은 순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로 인해 우리가 그 날의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을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환희 뒤에 있는 슬픔, 그리고 큰 축제 뒤에 숨겨져 있는 깊은 연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우리가 주님과 또 다른 방법으로 교통할 수 있게 되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와 교통하실 수 있게 됩니다. 목회자로서 뿐만 아니라 일반 성도로서 우리가 입으로 찬양을 드리면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찬송을 부를 때 회중을 살피다가 목회자만이 아는 은밀한 고통을 안고 있는 Marjorie에게 시선이 쏠리면 갑자기 목이 막히는 경험을 하면서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동안에도 Marjorie가 찬송가 가사를 읊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자주, 절대적으로 합당하고 평화와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예배가 슬픔과 연민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압니다(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가 “승리의 입성” 퍼레이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십자가와 그 희생을 통해 일어나게 될 모든 일을 향해 계속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축하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치르셨던 대가에 대해서는 슬퍼해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가 이런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종려주일”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에서 단절된 한 순간이 아니라 삶의 더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더 깊이 관여하는 방법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슬픔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예수님의 눈과 같이 될 때, 우리는 영광과 고통,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현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그 동일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장차 이루실 약속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 눈에서 모든 눈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본문 단어 연구
이 친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는 회중들로 하여금 위에서 언급한 누가의 본문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종려주일”과 연관된 내용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만일 누가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복음서었다면 그가 종려나무 흔들기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겉옷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누가가 제공하는 유일한 세부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타실 수 있도록 겉옷을 내려놓았습니다. 만일 누가복음이 유일한 복음서였다면 우리도 “호산나”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가 그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복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복음서였다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한 누가의 묘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지도 궁금해 집니다. 우리는, 두 번이나, 예수님을 환호했던 사람들이 제자들 밖에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실제 퍼레이드였습니까? 혹시, 그러길 바랬던 것은 아닙니까?
예화 아이디어
부활절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 것 때문에 다음 주일 아침까지 조급해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부활절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십자가 자체를 구원의 원천으로 보게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일어날 일을 아는 것이 우리를 십자가의 역설로 인도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봅니다. Neal Plantinga가 종종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이것은 총살형 받는 사람이 축하를 받거나 전기 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한 사람이 축하를 받는 것만큼 이상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그 죽음 안에서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놀라운 것을 성취하고 계시다는 우리의 인식 때문입니다. 부활절에 대해 알면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입성을 그 분의 장례 행렬로 보게 됩니다. 종려주일을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절 이전의 어떤 것으로 따로 취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골고다로 향하는 이 행진이 복음의 역설을 향한 첫 걸음입니다. 생명을 가져오는 죽음, 이 세상의 모든 잘못을 해결하는 희생. 예수님이 가셔야 했던 그 길을 우리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처음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마지막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죽음을 통과했기 때문에 세련되고 사려 깊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는 부활절을 축하할 것이며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 한가운데서 부활절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토록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피비린내 나는 상황을 고려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셨던 방식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 또한 불가피해 보입니다.
저자: Scott Hoez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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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28-4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