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28-36 주석

산 정상에 오르는 경이로움은 체험해본 사람만 아는 거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산꼭대기로 데려갈 때 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실제로, 깊은 계시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가복음 9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산 위에서의 드라마는 부분적으로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머지 사건은 예수님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누가복음의 더 넓은 맥락을 고려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을 준비하실 때 (눅 9:51 참조) 고난, 배신, 죽음에 대해 점점 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지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께서 임박한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때때로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눅 9:27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유의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걸 보게됩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신비스럽고 혼란스럽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눅 9:45에서 배신에 대한 또 다른 직접적인 예언 이후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보십시요). 또는 희생과 겸손에 대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도래할 왕국에서 누릴 권력과 특권을 놓고 논쟁하고 쟁탈전을 벌이면서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참조 눅 9:46-50).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참으셨는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필요한 지원을 받으실 수도 있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제자들은 어떠한 의미 있는 방식으로도 그분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고수하시도록 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해 했다면 아마 거부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의 태도와 말로 실제로 예수님을 다른 방향으로 잡아 당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에 무관심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잡아 당기는 행동으로 응답할 때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귀에 속삭이는 유혹자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봐라, 너의 친구들조차 안 따르잖아! 다른 길을 택해! 최소한 지상 왕국이라도 세우려고 애써봐. 그거라면 친구들이 너를 끝까지 따를 거야!”

예수님을 격려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적 이고 세상적인 목소리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그분의 아버지께서 대화로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시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주석가들은 모세가 시내산 언약/율법 (출애굽뿐만 아니라)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적 목소리와 변덕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말씀하시고  사역하는 종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대표한다고 오랫동안 지적해 왔습니다.

둘 다 변화산에 나타나게 하는 것은 구약 전체를 예수님의 사역으로 합치는 깔끔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면이 없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관한 내용을 숙고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해 논의 했다”는 말만 듣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입니다. 이 믿음의 거장들은 예수님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그 길에 세상의 구원이 있음을 격려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가야 할 방향으로 격려하기위해 그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해 다른 어떤 말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가는 이 눈부신 사건을 마치 아들의 불안을 감지한 아버지가 그를 지지하고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일부 지원군을 보낸것처럼 나름대로 달콤하게 끝나는 것으로 서술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마도 이 힘을 필요로 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진정한 인성에 대한 증거이고 예수님이 참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러 가셨다는 것은 그분의 참된 신성에대한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결국 육신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두 가지 모두를 반영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구원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하고 위대한 것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상황 가운데 깊이 졸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여 “번개”처럼 밝았다고 들었습니다. 번개는 상당히 밝습니다. 번개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이며, 섭씨 20,000도 (태양의 표면보다 더 뜨거운 온도)에서 1,000,000,000,000,000와트(0을 모두 세고 싶지 않다면 1조 와트)의 전기를 방출합니다. 번개의 에너지와 빛을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놀랍도록 강력하고 놀랍도록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현현 동안 잠시 동안 제자들이 졸았다는 사실을 접합니다! 그들이 완전히 깨어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 다음 매우 이상한 광경을 보면서 그들은 사실 아직 비몽사몽으로 아직 잠 속에서 꿈을 꾸고 있지 않은지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엄청난 장관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잠시라도 졸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이 제자들이 어떻게 이 사건 이후, 36절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대로, 그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비밀로 지키라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이 단지 아무 말도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 세 사람이 다른 아홉 제자들에게 조차도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한 도약이 아닐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일어난 가장 눈부신 시각적 광경 중 하나에 이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결론적 말씀이 “그의 말을 들으라” 일 수 있습니까?  들으라? “보아라”가 아니라 들으라고? 전체 사건이 눈보다 귀에 관한 것이라면 왜 이 눈부신 찬란한 번개 같은 일을 겪습니까? 하나님으로 부터 기대했던 말씀이 아닙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사건을 읽고 그것을 포장하고 선전하여 무대 위에 올려 놓고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을 바꾸고 모든 것을 뒤흔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와 같은 사건은 때때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소 다르게 전개됩니다. 이 본문의 경우 이 놀라운 영광의 계시는 대중의 눈 밖에서 일어났고, 그것을 목격했던 이들에게 조차 혼란과 졸음, 그리고 망설임등이 뒤섞였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전개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의문 뒤에 복음의 핵심 진리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졸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예수님의 영광이 그들 앞에 날마다 빛났음에도 얼마나 자주 예수님의 영광을 놓쳤는지에 대한상징일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눈에 띄게 빛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외로운 창녀와 버림받은 나병환자에게 말씀하셨을 때, 어리석은 세리를 구원하셨을 때, 그 때까지 평생 한 번도 용서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을 때, 보는 눈 있는 자에게 그의 영광이 빛났습니다. 영광이 거기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영광이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가 졸지 않는다면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것에 대해 침묵했던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카메라를 돌려 우리가 주일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에 대해  주중에는 얼마나 관심도 없고 침묵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시각적인 장면에서 보는 것 과는 상관없이 듣는것에 대해 말씀 하신 것을 이상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어쩌면 우리가 이 모든 것에 종종 세상을 따라 외적인 명성과 권력과 영광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예수님께서 겸손과 희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들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한 말씀을 진정으로 듣는 데 방해가될 수 있습니다.

곧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이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정말로 주의 깊게 들어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깨어진 세상을 위해 그 분의 헌신을 끝까지 마치시면서 외치셨던 말씀, “다 이루었다!” 우리는 그분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신중하게.

본문 단어 연구 Textual Points:

누가는 산꼭대기에서 일어난 이 현현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날로 부터 “8일” 후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는 이것이 6일 후에 일어났다고 제안합니다. Stephen Farris가 “The Lectionary Commentary”에서 지적한 것처럼 두 표현 모두 “약일주일 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슨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Farris도 암시하듯이 누가의 문맥에서 “여덟째 날”은 부활의 예표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여덟째 날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 이야기를 우리에게 제공한 유일한 전도자입니다). 따라서 변화산 사건의 시기에 대한 이 작은 세부 사항은 예수님께서 이후에 맞이하실 부활과 영광을 가리키는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예화 예시 Illustration Idea:

Frederick Buechner는 변화산 사건의 기이함이 결국 그렇게 기이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옷이마치 번갯불처럼 빛났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얼굴은 빛났다고 하지 않고 단지 “변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헬라어로 이것은 문자 그대로 그의 얼굴의 EIDOS가 바뀌었다, 그의 얼굴의 이미지 또는 외모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하나님의 참된 이미지, 성자의 이미지, 곧 성부와 하나이시고 꼭 닮은 성자의 이미지가 그 날 뿐아니라 평소에도 드러났음에도 제자들이 보지못하다 그 순간 포착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지.

우리 모두도 종종 서로에게서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붐비는 백화점에서 사람들 옆을 지나가고 지하철에서 그들 옆에서 밀칠 때나 비행기안에서  좁은 공간에서 서로 짜증을 낼 때, 우리는 쉽게 그것을 놓치지 않는지. Buechner가 말했듯이 우리의 모든 삶에는 변화산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일어난 일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 . .

Buechner의 표현처럼, “우리에게도 가끔 이런 일이 생깁니다. 공원에서 아이와 함께 산책하는 남자의 얼굴에서, 빵을 굽고 있는 여자의얼굴에서, 콘서트를 듣는 사람의 얼굴에서, 맨발로 모래사장에 서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바라보거나 친구들과 토요일에 야구경기를 관람하는 얼굴등에서. 아주 가끔, 너무나 감동적이고, 너무나 빛나고, 생동하는것이 사람의 얼굴을 거의 가슴벅차 오르게  변형시킵니다.”(Frederick Buechner, Harper San Francisco 2004의 “Beyond Word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