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시편 기자의 다양한 시들은 삶의 모든 경우와 계절에 가장 잘 맞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애가, 탄원, 고백, 찬양, 감사; 행복한 날에 어울리는 노래, 나쁜 날에 어울리는 노래; 신뢰의 서정적 표현과 버림과 분노의 쓰라린 외침.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시편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체 시편의 풍부하고 유연한 질감 고려할 때, 시편 중 어느 하나를 분리하고 절대화하여 교회의 모든 사람이 이 시편 기자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좋은 예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계란을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 계란의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위를 향하도록 한쪽 면만을 굽는 방법 – 역자주)”으로 굽는 것처럼 한쪽만 보는 것같은 히브리 시와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잔이 반쯤 차 있는” 시편중 하나이거나 “잔이 가득 차 넘치는” 종류의 둘 중 하나의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하나님과 우주의 고유한 공정성에 대한 확신은 숨이 막히도록 놀랍기도 하고, 약간 짜증스럽기도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확신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항상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이 좋은 하루를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좋은 하루를 보내더라도 누가 신경을 쓰겠습니까?! 왜냐하면 부당한 이익을 위해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의 부로 인해 숨이 막힐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순풍을 탄듯 그들의 마음의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Lectionary'(교회력에 따라 읽는 성구집)에서 건너뛰게 한 구절에서’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시편 기자는 25절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노래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이 모든 것을 읽고 말하기를 “정말? 진심이야? 나는 이 세상에서 훌륭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의 아이들이 죽고, 굶주리고, 집이 은행에 압류된 것을 “너희 팔 길이 만큼 긴 목록으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꽤나 사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고 그들이 잘못 되거나 비참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말 할수 있어. 정신 차려!”
이것이 시편 37편의 자신감 넘치는 어조에 대한 유효한 대답입니까? 글쎄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기도 하지만, 위에 잠시 언급했던 한 가지 사유를 고려하면 정답은 ‘아니오’입니다: 이 150개의 시 모음집에는 악인은 실제로 번영하지만 의인은 불공평하게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크고 단호하게 탄식합니다. 우리는 시편 37편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 시편이 세상을 분석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세상을 평가하고 더 강한 어조를 사용하는 다른 솔직한 애가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편 37편과 항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충실한 신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확실합니다. 때때로 신자들은 삶의 명백한 불공평함을 한탄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 기자의 지극히 낙관적이고 밝은 관점을 어떻게 대하고 이해해야 할지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한쪽으로 미뤄둬야 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야 할 때와 병원에서 끔찍하고 나쁜 진단을 받았을 때 그들이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때, 그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낙관적인 경건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글쎄요. 그럼 뭔가를 해보세요.
하지만 시편 37편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항상 사실이 아닐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유효한 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가 짓밟히고 슬플 때 하루가 끝날 때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모든 일의 방식도 결국엔 잘 풀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항상 북돋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정말로 끔찍한 상황을 만난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격려하려면 아예 격려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비전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이 아닙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든 면모에 대해, 우리는 마침내 모든 존재의 밝은 중심에 사랑이 많고 신실하고 은혜로운 언약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삶에서 이따금 보게 되는 작은 이정표를 통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혼란을 바로잡아 주실 것임을 다시금 격려받지 않습니까?
저는 그 모든 것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수사학적 질문을 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의 지인에게 시편 37편을 건네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주름을 조금씩 고쳐나갈 계획을 갖고 계신 공의와 의의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희망을 재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 곳을 찾는 것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시편 37편은 또한 다른 의미에서 우리 삶을 위한 영적인 안전장치(guardrail)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고픈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가령 탈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데, 나라고 탈세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이 시편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우리를 점검해 줍니다. “매우 부정직한 사람들이 일련의 부정직과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위에 오를 수 있다면 정직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덕이 어떠한 보상이 없으면 나는 악을 행하겠습니다.”
비록 악인과 부정직한 자와 범죄한 자들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인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모든 의에 뛰어나신 거룩한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쩌면 시편 37편은 딱 그것을 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에 의해 쓰인 것을 수도 있습니다. 즉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하면서 두손을 들어버린 친구들, 인생의 어두운 면모대로 사는 것이 더 괜찮아 보여 차라리 그것에 인생을 걸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덕과 신실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시편 37편이 쓰였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의 거의 모든 계절을 위한 시편이 있습니다. 이 시편들은 이런저런 경우에 맞는 이런저런 쓰임새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편들로 모든 신자가 매 순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일률적인 처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시편 37편의 약을 필요로 하는 순간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들에 우리는 조금은 지나치게 희망적으로 들리는 시편으로 인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디어
많은 사람들이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에 익숙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이 설교 주석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만약 시편 37편이 흔들리는 신자들에게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일부분 사실이라면 희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적절할 것입니다.
영화 초반에 앤디 두프렌스(Andy Dufrense)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붙잡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앤디의 친구 레드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실제로 가질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을 때 위험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DGNsbLayJw
그러나 앤디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하고 레드가 몇 년 후에 가석방된 영화 후반부에서 앤디는 레드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에서 앤디는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멕시코 마을에서 레드가 함께 지내기를 바라며 초대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레드에게 희망은 위험하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사실 희망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K30e9O3Nng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주위를 둘러보며 희망을 가질 만한 좋은 이유가 있기는 한 건지 의문에 가득찰 때 시편 37편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것일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은 희망이 결국 가장 좋은 것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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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37편 1-11, 39-40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