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예수님께서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상황은 그렇게 하기 너무도 힘든 상황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시지만 예수님과 그 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제 곧 지옥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그 시각 가룟 유다는 이미 최후의 만찬 식탁을 이미 떠났습니다. 더우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도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긴장된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왠지 말할 수 없는 슬픔도 감돌았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의 말씀을 하실 때 그분의 입술이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했더라도 저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성경은 인용된 대사가 어떤식으로 표현 되었는지 거의 알려주지 않습니다. 소설이나 단편 소설, 영화 대본과 달리 성경에는 “그가 엄하게 말했다” 또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와 같은 설명 부사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을 시작하실 때 눈가에 물방울이 맺히며 얼굴이 붉어지셨다 …” 하는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양한 대사가 어떤 목소리 톤으로 표현되었는지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의 경우,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자신 있게, 강력하게, 용감하게 말씀하셨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한 제자가 배반하려고 도망치는 것을 보고 다른 제자에게는 곧 당신을 부인하겠다고 말한 후 그분의 어조가 조금 더 슬픔에 잠긴 듯한 어조였다면 어떨까요? 조금 더 감정에 복 받친 어조로, 마치 우리가 장례식에서 말할때 순간의 감정에 복 받쳐 목소리가 흐느끼지 않도록 애쓰며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께서 이러한 위안과 평안의 말씀을 배신당하신 그 어두운 밤 그 상황과 일치하는 어조로 말씀을 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새로운 방식으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도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은 평안이 아닙니다.
결국 이 세상은 대부분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제공하는 아주 작은 평안도 항상 잠정적이고, 의심쩍고 불안정합니다. 세상은 스스로 확고히 소유하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마치 가난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돈을 우리에게 약속할 수 있지만 결국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전쟁을 사랑하는 세상은 평화를 약속할 수 있지만 결국 현실적이고 지속적인 실제 평화는 거의 없습니다.
평화가 있으려면 다른 곳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마도 슬픔에 찬 목소리와 그분의 뺨위로 눈물 한 두 방울을 흘리면서 이 평안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간절히 평화를 더욱 갈망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도 그 평안을 망치거나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줍니다. 소란과 비애 속에서도 예수님의 평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이유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러한 평안에 대해 말씀하신 시간과 장소와 방식조차도 이 세상 공포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샬롬을 취소할 수 없다는 증거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지속적인 평안을 믿으면서 동시에 슬픔에 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삶에 고난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과 우리의 상처, 예수님의 평안과 우리의 고난, 이 두 가지는 공존할 수 있고 실제로 공존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이 실제로 왜 매우 좋은 소식인 이유를 마음 속 깊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단어 연구
NIV영어성경은 “Counselor” (상담자)로 번역하지만 요한복음 14:25의 헬라어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단어는 parakletos 또는 우리가 때대로 음역할 때 “Paraclete” 입니다. (그러나 Microsoft Word는 계속해서 “Parakeet” (앵무새)으로 자동 수정을 시도할 것이기 때문에 주의하십시오. 비록 조류 이미지가 Spirit에 대해 사용될 수 있지만 … 그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새가 아닙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서도록 부름받은 이” 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지 여러 가지 해석들을 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법정에서 피고인 옆에 서 있는 변호사입니다. 그러나이 본문 맥락에서 의미는 이 일련의 설교 주석의 다른 곳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옆에 서있는 스테프나 조연출자와 조금 더 비슷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옆이나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데,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을 기억하도록 우리 마음속에 속삭여 주십니다.
슬픔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어둡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그날 밤 바로 그 방도 그랬던 것처럼). 그 모든 것의 슬픔은 우리의 자리를 잃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가장 소중한 것들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예화 아이디어
C.S. 루이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을 종교로 대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도착을 내비게이션으로 바꾸거나 결혼을 구애와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좋지만 여행 자체도 가치가 있습니다. 교제, 데이트, 누군가와 결혼하기 위해 구애를 경험하는 로맨스의 경험은 스릴 넘치고 독특하고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나 온전하고 건전하고 훌륭한 결혼을 향한 여정은 구애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됩니다.
결혼 생활의 구축은 초기 로맨스의 촛불과 장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상 생활의 냄비와 프라이팬에서도 확실히 계속됩니다.그렇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마치 매 끼 식사 때마다 식탁 건너편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은은한 눈빛, 불꽃 튀는 섹스 또는 뜨거운 로맨스의 끝없는 연속으로 설명하는 부부들에게는 무언가 의심쩍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애써 증명하려고 하는 듯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부부들은 결국 나머지 우리 모두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는 신호이거나, 진정으로 행복한 결혼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잘못 이해하며 허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Craig Barnes가 언젠가 쓴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물론 이걸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 핑계가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표는 안주함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를 더 깨닫는 것입니다. 더 깊이 인식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 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좀더 의도적이 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의 자서전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아버지이신 아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고 우리에게 오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풀어 설명해 주셨다는 내용). 예수님께서 다시 그의 아버지이시며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본 모든 것, 즉 그가 행하신 매우 명백하고 영적이고 전능한 일과 그가 행하신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되어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모두 사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당신을 삼키면 모든 것이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요한복음14:23-2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