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6:16-34 주석

오늘 본문은 누가가 이야기 해 주는 땅 끝까지 전해지는 복음의 역사에서 느낌표와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그렇게 먼 지평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우리를 그 곳에 데려다 줄 모든 주제들과 배역들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정복 할 그런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구원 메시지가 오늘 본문과 앞에서 말한 정복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귀신 들린 여종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며, 성령으로 변화된 간수의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그 여종은 바울과 실라가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 지릅니다. 그리고 그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라까?”라고 묻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세상을 변화 시킬 대답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오늘 본문을 설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구원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임을 밝히면서 이 이야기를 풀어 이야기 해주면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두 개의 구원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누가가 그 두 이야기의 느낌과 색채가 너무 달라서 그 두 이야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루디아의 이야기는 달콤함과 빛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녀는 비록 헬라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친절하고 관대하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즐거이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그 복음 전도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는 노예와 귀신들, 착취와 반유대주의, 폭력과 감금 등 이교주의가 가지고 있는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조차, 어둠의 땅에서 조차, 복음은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고대 사회를 주름 잡던 헬라-로마 문화 안으로 스며들어간 복음 이야기의 중요한 서곡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울가 실라가 기도할  곳을 향해 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곳은 유럽에서 가정 교회를 이끌던 첫 번째 여성 이방인인 루디아를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번에는 가는 길에 아주 다른 여성을 만납니다. 이 여성은 여종이었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노예로 매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인간 주인들에게 종으로 있었고, 두 번째는 더욱 심각하게도 그녀에게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준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 귀신을 일컫는 헬라어 단어에는 아주 길고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파이톤(python)’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자신의 먹이로부터 생명을 쥐어짜는 커다란 뱀을 일컫는 영어 단어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정확하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뱀이나 심지어 용을 일컬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 신화에 보면 파이톤은 델파이 신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예언을 했던 전설적인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불쌍한 여종은 인간적으로도 어둠에 살았고 귀신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등장하는 용을 떠올리다면 너무 과장일까요? 이 여종은 당장이라도 구원이 필요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바울과 함께 있던 전도 팀에 대해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바울은 그 여종으로 인해 몹시 괴로워하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아마도 그 여종이 매일 매일 바울을 따라다니며 같은 소리를 반복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여종이 말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바울이 믿는 하나님이 여러 신들 중에 하나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복음의 메시지가 어둠에게 잡혀 있는 그 여종의 입으로 나오는 것을 바울이 좋아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했을 때 잠잠하라 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괴롭혔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누구에게 묻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습니다.  그 여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그 귀신으로부터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즉시로 그녀는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어둠으로부터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종은 그녀의 “은사”로부터 부를 취하고 있던 주인들의 탐욕스러운 손아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귀신 없이는 그 여종이 점을 칠 수 없었으므로 그녀의 주인들은 분노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수입원을 잃어버렸고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성난 주인들로 인해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여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선 구원 받은 이야기에서, 루디아는 예수의 이름 앞에 대면하였고 그 결과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여종은 어떨까요? 그녀는 귀신으로부터는 구원 받았는데, 그녀의 영혼은 구원 받았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사건은 단지 이 복음 전도자들이 자신들의 그물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만 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 여종의 천한 신분이 그들이 극복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바울이 말한 “종도 아니요 자유인도 아닌”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소개한 이 여종은 아마도 그 도를 듣고 믿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그 예언하는 귀신을 대신하셨고 그녀의 마음을 여셔서,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루디아의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바울과 실라에게 일어난 일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법체계에의해 묶여 버렸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겪은 첫번째 일이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가난해진 분노한 그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장터로 로마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관리들에게 그 다음에게는 상관들에게 데려갔는데, 이는 로마의 지방 사법 체계를 이루는 두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몹시 화가 난 그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계 수단이 빼았겼다는 혐의로 고발한 것이 아니라(그들 자신의 인상에 그림자를 드리울 만한 혐의였을 것입니다), 세 가지 다른 심각한 혐의들에 대해 고발했습니다. 첫번째는 반 유대주의적 공격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평화를 교란한다고 고발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하면서 합당치 못한 종교를 퍼뜨리고 다닌다고 고발했습니다.

이 마지막 혐의로 말미암아 관원들과 듣고 있던 군중들은 폭동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하지 말아야만 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얻어지고 로마법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위대한 평화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제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구해줘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벗겨지고, 매 맞고, 감옥 가장 깊은 곳에 던져졌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의 발은 차꼬에 채워져 독방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복음 역사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려고 하는 이 용감한 사람들 앞에 그 발톱을 드러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이러한 폭동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복음 전도의 계기가 되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 안에 계신 성령이 그 여종 안에 있는 귀신 보다 더 강한 분이었을 뿐 아니라, 바울이 섬기는 주님이 이 로마 사람들이 섬기던 시이저보다 더 강하셨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그들은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고, 그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듣고 놀랐습니다. 그 때 주 예수께서 누가 진정으로 이 모든 일의 주관자이신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지진과 함께 주님께서는 감옥의 기초를 흔드셔서, 감옥 문들을 여시고, 모든 사람들의 차꼬를 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 감옥의 간수는 놀라 깨어서 감옥으로 달려갔고, 감옥 문들이 열린 것을 보자 자살하려고 칼을 꺼내 들었습니다. 이제 그 간수야말로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칼을 빼어 들자, 바울이 소리쳤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들은 왜 다 거기에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로마의 사법 체계 안에서 죄인이 아닐 것 같은 또 다른 한 사람을 구원하심으로써 이 중요한 순간을 복음이 진전하는 계기로 삼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10장에서  로마 군인 한 사람이 구원 받은 사건을 봤습니다.)

간수가 한 유명한 질문은 약간은 갑작스런 질문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가 자신의 직무 유기로 인해 상관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로마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그러나 여기에 좀 더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빌립보 시민으로서 그는 이 여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여종이 말하는 구원의 길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그는, 소위 그들의 범죄가 너무 커서 감옥에 마땅히 갇혀야 할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바울과 실라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아주 다른 종류의 구원, 궁극적인 구원을 묻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이 사람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온 세상에 전하고 있던 바로 그 복음을 그에게 전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복음에는 그 몇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며, 회심에는 예수님을 믿겠다는 순간적인 결정보다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교회 생활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세례 전에 좀 더 온전한 가르침은 필수였습니다. 간수는 자기 자신이 세례의 물로 씻겨지기 전에, 그는 전도자들의 상처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그들 앞에 음식을 베풀었습니다. 여기에 성찬식의 힌트가 있지 않을까요? 세례 후에 있는 성찬식?

다른 말로 하면, 이 이야기는 루디아의 집에서 있었던 일 처럼 뒤 이은 후한 접대와 큰 기쁨으로 끝이 납니다. 간수 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간수의 집안에 대한 이러한 강조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백성들을 다루어 오시는 방식인 언약적 방식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창 17:7).”

더 나아가서 온 가족이 구원 받은 사실은 빌립보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온 가족이 구원 받았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교회에 의해 선포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구원은 결국 교회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오늘 날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운동의 비극과 기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빌립보 로마 간수의 가정에 새로운 가정 교회가 세워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교회는, 후에 예수께서 만유의 주로 선포되어질 광대한 로마 제국의 사법 체계에도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많은 설교자들이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의 말로 알고 인용하는 인용구가 있습니다. “항상 복음을 전하라. 필요하면 말(言)을 사용하라.”  그런데 불행하게도 프란시스(Francis)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더욱 불행한 일은, 이 인용구가 말로 하는 전도와 행위로 하는 전도가 서로 양립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듯이, 말로 하는 전도를 위한 무대를 놓은 것은 선한 행동들입니다. 만일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이 불공정하게 갇힌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았다면, 지진 후에 감옥 문이 열렸을 때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용감하게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 간수가 보여줬던 것처럼 그렇게 그가 수용적이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반면, 바울과 실라가 간수의 간절한 질문에 분명한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면, 그 간수는 구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한 행위를 많이 한다고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들은 그 행위들을 하는 사람들의 선함을 증명해 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말만 가지고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전도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그 말들의 진실됨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말들은 공허한 울림이 될 뿐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감옥에 갇힌 사건에 대해 삶으로 반응함으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고, 간절한 질문에 대해 대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선언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