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27-32 주석

참 놀랍고도 반갑게도 Lectionary 본문은 오늘 부활절 둘째 주일에 사도행전으로 이동하여 오순절까지 계속 사도행전에 머뭅니다. 부활절의 궤적을 따르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교회와 세상에는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그러한 단 하나의 역사적 행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었고 얼마나 형편없이 준비 된 사람들이었지 그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명령은 얼마나 무모하고 때론 얼마나 우스운 명령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도행전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를 해나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장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제가 작성한 부활절 본문과 관련하여, 오늘 Lectionary가 그 본문을 사도행전으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 됩니다. 이사야 65장은 부활절을 장엄하고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습니다. 저는 이사야서 65: 17,18이 ‘창조하였다’라는 단어(히브리어로 ‘바라(bara)’이며 창세기 1장에 등장)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그 동사를 미래형이나 미완료형으로 번역할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고 장차 완성될 것이지만, 연속적으로 점증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새 세상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 5장에 있는 우리의 본문과 그 뒤에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증거를 통해 그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해 나가고 계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몇 구절들은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구절들을 더 큰 문맥에 비추어 살펴보면, 그 구절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시작된 초대 교회 이야기와 하나님 나라에서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 구절들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었는지, 혹은 세상에 대한 그분의 사명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에 상관없이, 그들은 성령이 그들 안에 있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복음 증거를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즉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자발적으로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단 한 번의 성령 충만한 설교 후에 삼천 명이 회심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사도들이 행한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의기양양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에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산헤드린(약 70명의 제사장들과 학자들로 구성된 유대교 최고 재판소)은 발생한 일에 대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이 기적과 그들의 설교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해명을 듣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서 불러 내었습니다. 성령의 권능 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이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령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단숨에 거부하였습니다.

그 후 더 많은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고, 더 많은 기적들이 행해졌습니다. 예상대로 산헤드린은 베드로와 요한뿐 아니라 나머지 사도들도 체포하고 투옥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이 적은 무리의 형제들을 근절하고 예수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말을 당장에라도 중단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열두 사도들을 부르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경비병은 감방은 비어있고 열두 사도는 바로 성전 뜰로 돌아와서 예수님에 대해 설교하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분노한 채, 산헤드린은 사도들을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경외심에 가득찬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부드럽게 대하기는 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곳입니다. 분위기는 긴장감과 심지어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이 일이 어찌 될까?”(5:24) 생각하면서 성가신 마음에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여기서 일종의 현상을 다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일로 인해 온 예루살렘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도들도 역시 두려워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어쨋든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을 죽인 바로 그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셨습니다. 그로인해 제자들은 두려움이 없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복음과 복음이 세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반대가 있습니다. 유대교 전체 권위와 교회의 전체 권위가 맞붙었습니다. 70명 대 12명이 성전 뜰에서 대결 한 것입니다. 70명이 12명을 침묵시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진보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중단될까요? 그 순간 누가 눈을 깜박이기라도 할 수 있었을까요?

산헤드린은 그들이 가진 모든 권위를 앞세워 우레 같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 하였도다.” 대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도 없었고, 그가 십자가에 매단, (문자 그대로) 저주 받은 그 범죄자의 이름을 높일 수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물론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유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제사장은 사실상  열두 사도를 증오 범죄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과 관련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설교함으로 당신들은 청중의 눈에 우리가 악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를 유일한 구세주로 전함으로, 당신들은 우리의 종교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일을 당할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역시 그들의 모든 권위로 담대하게 말합니다. 관리들이 처음으로 침묵을 명령했을 때(4:18), 베드로와 요한은 조금 더 공손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지만 이제 침묵하라는 이 두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더 담대한 진술로 맞섭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구절은 오랫동안 모든 종류의 시민 불복종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오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대의를 추구할 수 있다는 백지 위임장이 주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부분의 문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단지, 열두 제자는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변호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예수님께 더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는 복음을 구성하는 내용에 대해 매우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에서 하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더 넓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함의들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야만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복음 전파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선포를 통해서만 오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진행되는 하나님 나라의 진보에 있어 이렇듯 중대한 시점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들은 복음을 단 몇 마디로 매우 주의깊에 요약했습니다.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새로운 용어를 옛 믿음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오)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애초부터 진정한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그 사건은 어떤 다른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잘 알려진 구절처럼, 만일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조금도 참이 아니며 우리는 여전히 우리 죄 가운데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잘못 드러내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요청된 부활로부터 시작됩니다. 열두 제자들이 단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고, 그 죽음의 수단, 즉 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물론 그것은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이 유대 지도자들의 요점이었습니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과 반역죄를 지었기 때문에 성전과 로마 제국의 저주를 받마 마땅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복음의 요점입니다. 하지만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에 의해](복음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행하시는 분이심을 주목하십시오)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서 삼으셨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지상에서 A.D. 33년경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권세의 자리에 앉아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이라는 세 가지 행동들 안에는 복음이 담겨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그외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하거나 창조 세계의 아주 작은 영역에까지 하나님 나라가 이르도록 추진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복음의 한 요소가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기를 원하시는 일들입니다. 그의 증인들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 모든 일들을 예수님에게 행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행하셨습니다. 이 몇 마디 말에는 풀어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2000년 동안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고 어떻게 가르쳐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이사야서 65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것들이 변화 하기 전에 먼저 회개와 죄사함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사회 정의, 자선을 베푸는 일, 자비로운 행동들, 하나님 나라의 노선에 따른 인간 사회의 재정렬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기 전까지는 선행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그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할 수 있고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를 원할 수도 있겠지만, 다만 31절 하반절에 대해 두 가지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회개와 용서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써 용서를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용서만큼이나 선물입니다. 둘 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주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둘째, 예수님은 그 선물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후의 역사가 30절 하반절을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복음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가담한 사람들이 소수의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들만이 가담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목적이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라고 복음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사도행전이 전개 됨에 따라 드러나듯이 이스라엘에게 전해 질 뿐만 아니라 확실히 이스라엘에게 먼저 전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9-11 장).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의 미래가 위태롭게 보이는 이 극적인 순간에도 사도들은 그 분의 증인이 되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사도들이 예수 신화를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자작극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듣고 보고 직접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신들의 목숨까지 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입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생사가 그들의 증언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인간 증인들에게만 의존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성령이 오셔서 증인이 되기 전까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결국 하나님 나라를 저항할 수 없는 이유는 성령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 나라를 막을 수 없습니다. 산헤드린도, 사울도, 로마 제국도, 공산주의도, 포스트모던 세속주의도, “어둠의 왕자(The Prince of Darkness grim)”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들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빛과 능력이십니다.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은 사도들과 성령의 행전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역사적으로 유사한 중요한 시점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유대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셨다고 담대히 말하는 것은 증오 범죄는 아닐지라도 편협함의 극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주관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고통과 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는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죄용서를 전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오만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교회에 주어지는 위협은 교회로 하여금 복음을 전달하는 용어를 바꾸도록 회유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에 관한 이야기는 줄어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이야기들은 더욱 많아집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점령한 법정에서 행해지는 이 대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우리가 담대하게 사람이 아닌 예수님께 순종하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복음을 지속적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이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