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36-43 주석

초대 교회의 성장에 대한 누가의 설명을 읽다 보면 개구리가 수련 잎에서 다음 수련 잎으로 건너 뛰는 것(예루살렘에서 가자 지구, 사마리아, 다메섹, 욥바, 베드로와 요한에서 빌립, 스데반, 바울로, 그리고 다시 베드로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수련 잎 사이를 뛰어다니는 개구리의 이미지는 복음의 장엄한 흐름에 대한 모욕일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비유가 있다면, F.F. Bruce 가 기독교의 흥망성쇠에 대해 요약한 책 제목인 “확산되는 불꽃”(The Spreading Flame)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9:36-43에서 우리는 이 ‘번지는 불꽃’ 중 하나였던 작은 불씨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강력한 회심 이야기(에티오피아 내시, 사울/바울,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 비하면 짧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지구 끝까지 확산되고 있던 성령이 기름 부으신 불꽃의 주요 도약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록 작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교회의 성장만 아니라,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탄식하는 것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 말씀은 역사적 세부 사항, 도덕적 교훈, 문학적 풍성함, 신학적 밀도로 채워져 있습니다. 설교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 결정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가 초대 교회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에서 여러 사건들을 엮어 내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개종하여 세계 선교로 부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설교들이 너무 강력해서 유대인들이 스데반과 예수를 죽인 것처럼 바울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친구들은 그에게 쉼을 주고 그가 땅끝까지 이르러 선교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그를 다소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베드로가 다시 등장하는데, 우리가 그를 처음 만난 예루살렘이나 마지막으로 본 사마리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서쪽 끝에 있는 룻다에 있으며, 이 곳은 쌍둥이 도시인 욥바와 가깝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니느웨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욥바가 유명해졌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베드로도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베드로는 또 다른 문제, 즉 다비다 또는 도르가(둘 다 가젤을 의미합니다)라는 여제자의 죽음을 처리하기 위해 룻다에서 욥바로 부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이야기가 갑자기 진행됩니다.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우리는 욥바에 여제자가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여제자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도행전에서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이름이 긍정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오순절 이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이야기가 남성에 대한 것이기에 이 여성의 등장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특히 그녀가 뛰어난 여성이고 또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어떤 설교자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이 여성이 한 일을 크게 부풀리고 싶은 충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비다는 그녀가 갖고있는 특권, 곧 그녀의 재력, 정당한 행동들과 은사들, 예언적 설교를 과부들과 궁핍하고 굶주리고 우울하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처벌 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그 설교는 올바른 사회가 원하는 모든 사회 정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을 약간 부풀린 것입니다. 나의 충고는 그녀가 여성이고 그 면에서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되, 여성이 항상 ‘확산되는 불꽃’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참고, 사도행전 2:17,18). 위에 말한 설교자처럼, 이 이야기의 요점을 놓칠 정도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사하게, 일부 설교자들은 그녀의 정의와 자비를 베푼 일들에 대해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이야기의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한 유명한 학자의 말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선한 행실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도르가의 칭찬할 만한 모범이 오늘의 주제이며, 선교가 종종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교회에 일깨워줍니다.” 물론 복음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 전파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는 마지막 작은 언급에 깊은 의미를 두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실제로 여러분의 설교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두장이는 죽은 동물의 가죽을 가져다가 가죽 장화와 옷 등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죽은 동물을 만진다는 이유로 그는 유대교 신앙의 정결예법 측면에서 볼 때 부정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 집에 거했다는 것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이 열려 있다는 표시이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극적으로 부르셔서 불결한 고넬료에게 설교하도록 하실 다음 장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맛보게 합니다. 얼핏 보면 중요하지 않은 작은 것이지만 교회사의 주요 발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 모든 것, 즉 여 제자, 증인으로 선행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 정결예법의 관점에서 부정한 사람을 수용하는 것 등은 본문의 중요한 측면이므로 설교에서 충분히 강조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분문의 핵심은 도르가/다비다의 부활입니다. 여기에 사울의 회심만큼 큰 반전이 있습니다.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역자 주, 찬송가 305장 1절 후반부 Once I was dead, not I am alive)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베드로가 각각 죽은 자를 살리신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이,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지상 사역에서 죽은 자를 세 번 살리신 예수님과 같이 위대한 예언자들의 긴 행렬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구속 사역에서 적법하게 중요한 선지자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요약하려고 합니다. 나는 구속 역사가 아직 진행 중이라는 것을 교회에 알리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사도신경에 요약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는 위대한 교리의 실례입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예수님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교리에 대한 하나의 작은 역사적 증거입니다.

이러한 강조는 일부 설교자들과 신도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육체적 부활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임재하고 계시는 초대 교회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증인이 되는 것에 대해,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해 증언하는 대신, 그 학자처럼 이야기 주위를 맴돌게 됩니다. 성경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까? 이 기적이 도르가에게도 일어났습니까?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말합니다. “도르가는 살다가 죽었고, 사람들은 울었고, 베드로가 기도했고, 도르가는 살아났고,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42절에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부활에 대해 설교하기를 주저하는 한 학자는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고 해서 교인 명부가 부풀어 오른 적은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교회 출석과 교인 수가 거의 서구 전역에서 감소하고 있는 오늘날, 아마도 이것이 교회와 세계가 들어야 할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은 믿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믿음의 핵심일 것입니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문화적 편견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좀비나 뱀파이어, 그리고 악마에 대한 것이 아닌 한, 아마도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말을 무척이나 듣고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죽어가는 세상에 명확하고 위안이 되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기독교 복음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르가와 같은 사람들이 행한 정의와 자비의 행위이며, 또한 부활의 행위입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아주 드물게 일어나지만, 교회사에 특별히 언급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일이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평생 죽음의 공포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히브리서 2:15)이 가장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언젠가 우리 모두는 “다비다여(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보십시오), 일어나십시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미국 서부의 끔찍한 화재 생존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불이 번지는 데에 필요한 것은 오직 작은 불씨 하나입니다.” 불은 아주 위험하고 끔찍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불이 난로 안에서 타고 있거나, 산불 진압을 위해 소방관이 시작한 불이거나,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바늘을 소독하거나 역병에 휩싸인 집을 태우거나, 또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 후 적의 요새를 불태워 다시는 사용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등이 불이 끔찍하지 않게 사용될 수 있는 사례들입니다.

또는 오순절에 내려주신 성령의 불처럼, 불은 창조와 질병과 죽음과 슬픔이 없는 새 창조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 사도행전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확산되는 불꽃은 우리가 몇 주 전에 이사야서 65장에서 읽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마침내 귀결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욥바에 불이 붙은 하나의 불씨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 교회에서 불을 일으키는 하나의 불씨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내 안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자: Stan M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