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5:1-14 주석

이 이야기에는 Charles Dickens의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시리아 군대의 사령관 나아만, 이스라엘에서 납치되어 노예가 된 용감한 소녀, 아무 것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왕, 탐욕스러운 게하시, 그리고 흔들림 없는 선지자 엘리사도 물론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린 소녀, 진흙 투성이의 강, 깨끗하게 된 장군에 대한 겉보기에는 단순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단지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를 위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가능성 있는 여러 접촉점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치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치유기도에 대한 성경의 중심적 이야기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질문이 제기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런 식으로 치유하십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작은 일을 사용하여 큰 일을 이루시는 방법에 대한 격려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어린 여종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입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반면, 이스라엘 왕은 정치적 가능성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흙 투성이의 요단 강을 더러운 사람을 깨끗하게 씻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친 로마 십자가와 같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구원의 수단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또는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개인적, 국가적 자만 때문에 깨끗해지고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뻔했습니다. “나는 선지자로부터 개인적인 관심을 받을만한 귀한 사람이다. 선지자가 어찌하여 나와서 손을 흔들며 자기의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고, 나와 같이 고귀한 자를 위하여 단장하지 아니하느냐? 그리고 우리 나라에 훨씬 더 깨끗하고 장엄한 강이 있는데 왜 나 같은 고귀한 사람이 이 진흙 투성이의 강물에 씻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교만은 넘어짐의 선봉”이며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오늘 이야기에 비추어 사실이고 도움이 될 듯 하지만, 실제로 이야기의 핵심은 아닙니다. 우리는 26절에 나오는 게하시의 탐욕에 대해 엘리사가 책망하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 이야기의 더 깊고 더 중요한 메시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기적에 대한 보상으로 엘리사에게 주려했던 전리품 중 얼마라도 얻기 위해 몰래 빠져나갔지만, 엘리사는 그 전리품을 거절했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의 붉은 손을 잡고는,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 받을 때이냐?”라고 말합니다.

“지금이 받을 때이냐?”라는 말에는 무언가 불길함이 배여 있습니다. 엘리사는 어느 때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악한 왕들로 인한 국가적 쇠퇴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에 그러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 책들은, 사악한 백성들과 더 사악한 왕들로 인해 나라가 폐허로 변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길고 느린 쇠퇴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도덕적, 영적 타락의 한가운데에서 물에 가라앉고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인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이야기 입니다.

이 두 책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 재앙의 반대편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항상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지난 겨울 두 대의 보잉 737 맥스 8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도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질문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종사 실수 때문입니까? 장비 불량 때문입니까? 누구 탓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이 역사서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집을 잃고, 땅과 성전을 잃었으며, 국가 정체성마저 잃게 만든 그 재앙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이스라엘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이 있었을까요? 개인의 삶과 국가의 삶이 모두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는 트루먼 대통령부터 트럼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미국 역사상 12명이 넘는 “왕”의 통치를 겪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한 당에서 다른 당으로 어떻게 채찍질을 해왔는지 보았습니다. 저는 민주당원들이 현 공화당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을 들었고 공화당원들이 오바마 대통령을 어떻게 비난했는지 기억합니다. 양측은 국가가 재앙으로 치닫는 길고 오랜 산사태같은 곤경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상대방의 잘못이며, 그런 경향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긴장과 음모가 뉴스 매체를 뒤덮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신 또한 지배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매혹적인 성경 이야기는 우리가 그러한 중요한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 났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까? 왜 우리는 이 곤경에 처해 있습니까? 누구 탓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

마지막 질문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가 말하려는 바입니다. 한 국가의 삶 가운데, 실로 모든 민족의 역사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포함하여 개인의 삶 가운데 계신 하나님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야기의 가장 처음 등장하는 단어에서부터 이 주제를 듣습니다. 위대한 사람이었고 성공한 사람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이교도였던 한 사람을 소개받습니다. 그는 수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시리아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한 시리아인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여호와와 경쟁했던, 바알신의 다른 이름인 시리아의 신, 림몬을 숭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을 상실케 하는 유일한 질병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첫 구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잠간만요! 뭐라구요? 하나님이 그 위대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어린 소녀 선지자를 세우시면서, 이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은 치유해달라는 요청을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왕에게는 모든 것이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장군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력을 과시하면서, 엘리사의 집에 올라 왔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었던 기름지고 녹조가 가득하고 진흙 투성이인 요단 강을 통해 그 위대한 장군을 치유하셨습니다. 마침내 그 장군은 어린 소년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치유되고, 유대교로 개종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말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복음에 합당한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가 말하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 나라까지도 다스리고 계시며 하나님은 가장 더러운 죄인이라도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이 나며, 등장인물들은 알지 못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야기의 모든 세세한 부분에서도 함께 계셨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능력 있는 사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재앙에 빠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과 그 왕들이, 나아만이 결국 마지못해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전에도 그렇게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정치와 개인의 성공에만 치우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편이 승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앞서 나가려면 어떤 신을 섬겨야 할까? 엘리사가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라고 묻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정치적 개입이나 개인의 번영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세상은 정치적이기에 우리는 권력과 그 권력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재정과 돈을 가장 잘 사용하는 일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세상의 염려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일에 대한 것이고, 우리가 속한 정치적 당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관한 것이고, 포트폴리오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관하고 계시고 있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국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아무리 황폐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원수에게서 건지실 수 있습니다. 트럼프나 바이든, 공화당이나 민주당, 러시아나 중국이나 영국이나 미국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신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분은 후에 예수라 하는 유대인이 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당신이 나아만처럼 아무리 불결하다 하여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에게서 아무리 멀어져 있다 하여도 당신을 정결케 하실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녀와 진흙탕같은 강물, 깨끗해진 장군을 사용하여 나라의 쇠퇴에 개입하신 하나님은 아들의 피로 우리를 눈보다 더 희게 씻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 이야기의 메시지를 특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몇 가지 신약성경 구절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오늘날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통치가 수정같이 분명하게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계시록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보좌 옆에 서 있는 한 장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냐?”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당신이 힘든 곳에서 비천하게 섬기는 어린 소녀이든 권력과 성공을 과시하는 고위직 사람이든지 간에, 진흙 투성이의 강가에 살고 있든 장엄한 미시간 호수가에 살고 있든지 간에, 당신이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굳게 믿든 그 분의 이름을 거의 알지 못하든지 간에, 또는 당신이 더러운 죄인이든 흠이 없는 성자이든지 간에,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지 간에, 미국인이든 캐나다인이든지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든지 가능한 한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든지 간에, 단도직입적이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이 메시지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주이시며 만유의 주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