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인 오늘, Lectionary의 네 개의 본문들은 “과거와 미래”라는 공통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의 과거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하나님께 미래에는 이스라엘의 영화를 회복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빌립보서 3:4-14에서 바울은 미래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얻고자 그의 걸출했던 과거를 등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놓여 있는 상을 위하여 길을 재촉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인, 요한복음 12:1-8은 얼마 전 과거에 일어난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 근거하고 있으며 앞으로 다가 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갈 때 이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을 꼭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제 이사야 43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과거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원 받은 전형적인 이야기를 반복한 후에, 이스라엘에게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질 정도로, 하나님께서 미래에는 너무도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따라나옵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이스라엘이, 비록 지난 과거를 알고 있을지라도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소망이 없는 상태로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다고 이사야 43장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 중반인 BC 550-538년 사이에 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40-55장에서 소망에 대해 예언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에게는 속박으로부터 벗어 날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에서 수 백 마일 떨어져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 거리가 거의 1700 마일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 거리가 “단지” 900 마일 정도라는 의견을 고수합니다. 그 차이는 아마도 “직선 거리”와 “곡선 거리”의 차이일 것입니다. 물이 풍부한 유프라테스 강이나 다른 강들의 굽어진 수로를 따라간다면 그 거리는 더 멀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라비아 사막을 가로 지르는 “지름길”을 선택한다면, 뜨거운 모래 밭을 지나야 하고 때때로 만나는 오아시스 외에는 마실 물을 한 방울도 얻을 수 없지만 그 거리는 900 마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로 탈출하든지 간에 그런 생각은 유대인 포로들에게는 공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바벨론의 강한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지정학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아직은 너무 먼 미래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곳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그들에게는 그 곳에 도달하리라는 어떤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구절 안에서 두 번째로 전형적인 예언적 서언을 듣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This is what the Lord says).” 좀 더 이전 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가라사대(Thus saith the Lord).” 이 말씀은 선지자 자신의 말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해 하나님께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하늘도 압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입니다.
앞 구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이제 약속하시려는 바를 하실 수 있고 하실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용어로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여호와는, 나라들과 자연을 통제하시는 전적 타자이신 “거룩하신 이”이십니다. 여호와는, 반유목민인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을 취하셔서 택함 받은 백성으로 바꾸어 주신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리고 느브갓네살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여화와께서는 포로 된 그의 백성들에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태어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상기시켜주십니다. 16절과 17절은, 마치 미국 건국 이야기에 등장하는 필그림 이야기나 독립전쟁 이야기와 유사한, 이스라엘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시면서,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다시 상키시키고 계십니다. 이집트 사람들을 홍해 가운데 있는 마른 땅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성벽 같이 높은 물의 벽이 바로의 군대를 내리치게 하심으로 그 군대를 물리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모두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이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로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체성은 그들의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로 이러한 권능의 구속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적 간섭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존재하지도 못했을지 모릅니다.
여호와의 그 다음 말씀이 더욱 놀라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잠깐만요! 정확하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도록 만든 죄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을 잊어버린 죄 아니었습니까? 시편 106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끔찍한 망각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그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여호와께서 과거에 있었던 이전 일들을 잊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 지난 30여년간 근자에 경험했던 어려움을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이전 일들”이 말하는 좀 더 분명한 일은 하나님께서는 지금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 일들을 잊으라고 말씀하고 계실까요? 그 이전 일들이라는 것은 불평을 하기도 했고, 필요한 것들이 부족하기도 했으며, 하나님이 떠나계시고 했던 한 세대 전체를 향한 죽음의 심판을 포함하는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과거의 일들은 출애굽을 이루신 기적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거의 일들이 품고 있는 그 부정적인 사건들을 잊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과거를 잊으라고 요청하시는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래에 집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전 일들을 잊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에 대해 이스라엘이 소망을 가져야 한다고 요청하고 계시는 과장법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구원은 단지 과거에 있었던 일이며, 그들에게 좋은 날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제 역사하지 않으시며, 또 다른 출애굽을 기대하는 소망은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또 다른 출애굽 말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의 방식입니다.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신 하나님께서는 “사막에 길을” 내실 것입니다. 홍해를 마르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강을” 만드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 이끌어 내실 때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이끌어 내심으로 또 하나의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타는 모래 사막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길을 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물을 주실 것입니다. 마라에서 반석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던 샘물이 아닌, 광야를 가로 질러 흐르는 시냇물, 심지어 강들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설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그 다음 구절들에서, 이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하나님을 수고롭게 하고 있고, 그들의 반역으로 하나님을 괴롭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기도할 때나, 제물을 드릴 때에도, 그들의 종교 활동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행해진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시작된 첫 날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신실한 언약 당사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구원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은 자격 없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는, 이 사실을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하실 것이고 그들이 가는 동안 물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은 …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선한 사람들인가를 아시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선한 사람들이 되어 그 분의 은혜를 찬양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질문들은 우리 청중들을 강권하기에 좋은 질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할 것이다! 이제 나타낼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우리 대답은 거의 항상 동일합니다. “아니요. 저는 알지 못하겠는데요. 내 인생에,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이 제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에서, 우리가 볼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새 일을 행하고 계심을 믿도록 청중들에게 요청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빈 무덤이 교회력에 따라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금요일과 부활절 날 거기서 놀라운 새로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온 세상을 구속하시고 새롭게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아직 그 일들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시작된 이야기를 되풀이하면서 청중들이 그 신앙의 미래 성취를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고취할 때에라도, 과거에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자의 미래에 새로운 일들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도록 청중들에게 요청해야 합니다. 정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통제를 넘어서는 힘에 의해 붙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고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번영을 다시 누릴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말씀을 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 이야기’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 속에 자비의 물을 흐르게 하시고 은혜의 강물을 흐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강조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충만하시고 그분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실 새 일을 기다릴 때에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예화 아이디어
오늘 본문의 “과거와 미래”라는 다이나믹은 저로 하여금 매일 보는 모든 “이전과 이후”라는 그림들을 다시 생각나게 했습니다. “이전”에 300 파운드 나가던 사람이 체중 감량 프로그램을 실천한 “이후”에 185 파운드가 되었다는 체중 감량 프로그램을 선전하는 광고들이 있습니다. 또는 첫 번째 사진에서는 여드름으로 흉터진 얼굴을 가진 여인의 사진을 보여주고, 두 번째 사진에서는 3개월 동안 크림을 사용한 후 깨끗해진 얼굴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얼굴의 흉들을 깨끗하게 해주는 스킨 영양 크림의 광고들도 있습니다. 혹은 California에 있는 Paradise라는 도시에서 발생한 끔찍한 화재로 인한, 화재 이전의 도시 모습과 화재 이후의 처참한 도시 모습을 비교하는 사진을 우리는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이전의 모습과 하나님께 새 일을 하신 이후의 모습을 대조합니다.
저는 최근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이지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Purple Hibiscus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은, 자신의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서는 엄청난 선행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가족에게는 끔찍한 악을 행하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톨릭 신자인 한 사업가의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의 이름으로 주변에는 부를 나누어 주면서도, 동시에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 폭군처럼 행동합니다. 교회법을 어기는 사소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 결과로 그녀는 두 번의 유산을 경험합니다. 상황은 더욱 나빠져서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죽을만큼 폭력을 가합니다. 그의 딸이 이교도인 할아버지의 그림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지옥 같은 삶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버지는 공동체를 위해 너무나 많은 선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이처럼 학대한다는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기독교 버전의 Hannibal Lector같은 이 사람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죽은 채로 갑자기 발견되기 전까는 말입니다. 그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딸에게 행해진 폭력을 목격한, 처참히 짓밟혔던 그 딸의 어머니는 점차로 그 아버지를 독살해 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손으로 그 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저자: Stan M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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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3:16-2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