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늙은 농부가 저에게 달걀을 깨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순간에 망치로 부술 수 있고 또는 따뜻한 암탉 밑에 며칠 동안 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한 목사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와 믿음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키라 아니면 불에 따라”라는 설교로 죄인을 부술 수 있고 아니면 “돌이키라 그리고 살아라” 라고 그녀를 초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눅 13:1-9)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같은 설교를 하십니다. 사람들이 뉴스에서 최근 몇 가지 재난을 지적하고 희생자들이 어떤 지독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무서운 어조로 “내가 말하노니, 아니다. 그러나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55장에서는 하나님은 두 번째 같은 종류의 설교를 하시며 바벨론 포로들을 향해 회개하고 살라고 부르십니다. 아마도 두 설교의 차이점은 예수님의 청중은 죄로 인해 방금 형벌을 받은 “그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인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고 한편 이사야가 설명하는 청중은 그들의 많은 죄들로 인해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가난하고 궁핍하며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작은 하나님의 은혜의 한 모금 혹은 하나님의 긍휼의 한 조각이라도 죽도록 간절히 바라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번 대림절 3번째 주일에 어떤 본문을 선택하느냐는 당신의 회중이 사순절 여정에서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죄로 완고해져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돌리키라 아니면 불에 따라”는 설교로 부서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간신히 매달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이사야서 55장의 “돌이키라 그리고 살아라”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이사야는 분명히 죄를 회개하라는 외침입니다. 6절과 7절은 틀림이 없습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십시오.” 이것은 항상 사순절의 어두운 면의 일부였습니다. 당신의 죄에서 돌이키십시오. 그러나 사순절과 회개에는 또 다른 면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부터의 부정적인 전환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의 긍정적인 전환을 말합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으라… 그를 부르라… 주님께로 돌아오라 …” 이것이 중요한 구별입니다. 오늘 관심있게 집중하는 것으로 인해 사순절이 도덕적 성찰의 암울한 시간이 될지 아니면 영적인 방향 전환의 밝은 때가 될지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초점은 회개에 대한 부르심을 덜 긴급하거나 심각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6절은 “찾을 수 있을 때”와 “가까울 때”라는 신비한 말씀으로 돌이키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계시지 않으실때, 은혜의 제안을 철회하실 때,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때가(곧?) 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일부 주석가와 설교자는 그런 식으로 정말 말합니다. 회중이 그 자리에서 지금 회개하도록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인에게서 멀어져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때가 있습니까?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없어 죽을 때에만 그런 순간이 온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지만, 보다 진보적인 설교자들은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종말론적 추측에 빠져들기보다는, 이사야의 바벨론 포로로 있는 청중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좋을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은 집과 성전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지금 여기 있다. 미루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는 회중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다른 시간, 당신 인생의 다른 장, 다른 교회, 다른 설교자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시므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라”는 회개하라는 이 부름에서 압도적인 말씀입니다. 돌아서지 말고 오라고 다섯 번 말씀하십니다. “오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와서 사 먹고, 와서 포도주와 우유를 사러 나에게 오라.” 첫 3절은 명령으로 가득 차 있지만, 명령이라기 보다는 초대인 것처럼 들립니다.
흥미롭게도 회개에 관한 이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 즉 음식과 음료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입니다. 그러므로 오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예수님이 자신을 생수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요 4:14, 6:51, 7:37). 오라, 당신이 배고프다면 와서 사 먹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당신의 기본적인 생계인 떡과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값진 것”인 풍성한 포도주와 우유입니다. 당신이 풍부하고 충만하고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라는 부르심은 지옥을 피하라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천국을 누리라는 부르심입니다. 이 설교자는 지옥에 대한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아름다운 잔치(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적 잔치?)의 그림을 그리면서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우리 설교자들이 하려고 애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그의 은혜가 세상의 기쁨보다 훨씬 더 즐겁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어떤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2절에 있는 이사야의 질문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멈추게 합니다. “어찌하여 떡이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만족을 주지 못한 데 수고를 하느냐?” 정말 왜 그렇습니까? “떡이 아니라…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 보다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과 수고의 낭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받는 축복이 공짜라는 말을 들을 때 더욱더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약 돈이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드릴 것이 없더라도 와서 사 먹을 수 있습니다. 사실 주머니에 돈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가져오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음식과 음료는 값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실 당신이 모은 평생의 돈으로 그것을 사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값없이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 삶은 부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공짜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돌이키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열방이 당신에게 돌아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희가 내게로 돌이킬 때에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내 충성된 사랑이 다윗에게 (그리고 너희들도) 만민에게 증인이 되고…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바벨론 포로들과 오늘날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새 생명,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다윗에게(다윗보다 오래 전부터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 즉 열방의 빛이 되는 사명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사명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삶을 다시 좋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로 인해 쇠약해 져서, 우리는 삶이 다시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어떤 일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자들, 심지어 이전의 반역자, 심지어 최악의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 돌이켜 살며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특히 당신이 포로 중인 이스라엘 사람인 경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소리입니다. 70년 동안 당신은 죄로 말미암아 갑절을 받고(이사야 40장), 당신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진노하시고 완고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서 55장에 약속된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는 7절에서 하나님의 결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세게 내려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포로 생활 중에도 자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풍부히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죄는 마지막 말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처벌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용서가 합니다. 포로 생활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집 입니다. 마귀는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가 풍부히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으로 설교를 끝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비평가들이 이사야 2서(40-55장)라고 부르는 것의 초점이 되어온 종이기 때문입니다.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이 바로 여호와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통해 약속한 분이십니다. 종의 사역에서 다윗에게 약속된 긍휼이 성취 되었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53장의 유명한 종의 노래로 표현하자면, 그 종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제공하시는 새 생명의 값을 지불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느니라.” 우리의 생명으로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서 6장 23절에서 요약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경멸하는 교양 있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평생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문이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새로운 삶, 풍요로운 삶, 의미 있는 삶으로 가는 길을 생각해 낼수 없습니다. 은혜는 결코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겸손히 돌이키고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뿐입니다. 겸손하게 “오라”는 초대를 받아들이십시오. 돌이키고 사십시오.
예화 아이디어
누가복음 14장 15-24절에서 예수님은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손님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지만 모두가 ‘정말 좋은’ 변명으로 거절하였습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가장 작은 자, 나중 자, 잃어버린 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풍성한 잔치에 그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에 대해 너무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종들에게 “그들을 들여보내서 내 집이 가득 차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을 위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큰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 긴박함과 열정과 사랑으로 설교하십시오. “돌이키고 사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너무 집착한 자들은 초대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며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마지막 마스터 카드 “Priceless” 광고가 TV에서 큰 인기를 얻은 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당신은 이 광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농담같은 세 마디 말 후에 획기적인(펀치 라인)말을 합니다. 몇몇 불운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세 장면 이후의 펀치라인은 “고맙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위해 마스터 카드가 있습니다.” 그 광고는 너무 길어서 매력을 잃고 불쾌한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Priceless” 아이디어는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격이 없으며 가격 이상입니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값은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자: Stan M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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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5:1-9 주석